1년 전 이맘 때 세계 3대 은행의 하나인 HSBC는 "미국의 집값 하락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20%가 부실화해 충당금을 더 쌓기로 했다"는 내용의 공시를 내놓았다. 월가는 생소하고 뜬금없는 이 '고백'의 의미를 잘 몰라 허둥대면서도 기껏해야 일회성 악재 정도로 가볍게 여겼다.
풍부한 유동성 속에 사상 유례없는 '황소 장세'가 전개되리라는 축복과 복음이 시장을 지배하던 시기였던 까닭이다. 지금은 이름만으로도 공포스러운 '서브프라임 망령'이지만, 그 출현은 이렇게 시시한 에피소드로 시작됐다.
■ 서브프라임의 쓴맛이 준 교훈
이 괴물이 6개월 여의 잠복기를 거쳐 지난해 8월 BNP파리바의 펀드환매 중단 사태를 부를 때까지, 그 정체를 제대로 알고 화근을 다스릴 방안을 찾아볼 계기는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광기에 들뜬 시장은 그 때마다 "일부 부동산시장과 파생상품시장에 한정된 문제"라고 일축했고, 인플레이션 관리에 더 관심이 많았던 벤 버냉키 FRB의장 역시 "서브프라임의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줄곧 과소평가했다. 앨런 그린스펀으로부터 건네받은 월계관 속에 '독배'가 숨겨져 있다는 월가의 경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후 누구도 제어할 수 없게 커져 버린 이 괴물이 첨단 금융공학의 탐욕과 허구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세계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를 얼마나 압박하는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직도 이 괴물의 전체 모습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교훈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도쿄에서 만난 G7(선진 7개국)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들이 지난해 10월 워싱턴 회의 때와 달리 서브프라임 문제의 심각성 및 공동대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금융회사들에게 손실규모를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촉구한 정도가 고작이다.
소위 경제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공짜 점심은 없다"고 강조하고 무임승차 행태를 경멸한다. 수익과 편의를 얻으려면 반드시 적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행여나 값싸게 혹은 거저 먹으려고 하면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소한 개인간 거래는 물론, 성장과 분배 등의 거대한 국가적 담론에까지 어김없이 이 분석틀을 들이댄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부실의 온상인 초저금리와 과잉유동성이 수년간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거품을 들끓게 했을 때 '전문가'들은 대부분 "세계경제의 탄탄한 성장세는 굳건하다"고 바람 잡으며 공짜 점심을 좇아갔다. 그러나 달콤한 유혹의 대가는 쓰디쓰다.
앞으로 세계 경제가 자만과 태만으로 빚어진 혼란을 수습하고 복원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정권교체기의 권력공백을 반영하듯, 우리 경제를 관리하는 주체가 분명치 않고 긴장감도 찾기 힘든다.
물러갈 정부의 관료들은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과 미국의 경기둔화가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다고 말하고, 새 정부를 이끌 사람들은 올해 성장목표에 미칠 악영향 걱정이 우선이다. 경제의 전체 그림을 그려내지 못한 채 '잘 되라'는 주문만 외우고 있는 꼴이다.
이명박 당선인이 기회 있을 때마다 틀에 박힌 이론이나 분석을 뛰어넘는 열정과 의지를 강조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긍정과 낙관의 힘을 설파하는 것은 자신감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이다.
얼마 전 국정과제 보고회에서 연 6~7% 성장과 60만개 일자리 창출을 재확인한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수단으로 내놓은 것은 기업규제 개혁과 노사화합 정도에 그친다. 원님 행차는 요란하고 수레에 담긴 상품은 많은데, 막상 손님을 끌 물건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 정책목표와 현실 간극 좁혀야
그래도 지금은 국민들이 다양한 욕구를 참아내지만 보름 후 새 정부가 출범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잘 나가는 세력일수록,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 만큼 지금부터 주요 경제지표와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희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성장과 규제의 양뿐 아니라 질도 중요하다. 정교한 프로그램 없이 요행에 기대는 공짜 점심은 이 당선인의 취향에 맞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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