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테니스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새 역사를 쓴 뿌듯함이 이형택(32ㆍ삼성증권)의 얼굴에 가득했다. 한국 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데이비스컵 월드그룹에서 승전보를 전한 이형택은 “앞으로 한국 테니스의 가능성을 보여준 경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월드그룹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후배들에게 이어지길 바란다”며 벅찬 소감을 밝혔다.
데이비스컵은 105년 전통의 테니스 국가대항전. 전세계 127개국이 참가해 본선격인 월드그룹에는 16개 나라로 좁혀진다. 지난 해 9월 한국은 슬로바키아를 꺾고 1987년 이후 20년 만에 월드그룹 16강에 올랐다. 이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월드그룹 본선의 벽은 높고 견고했다. 한국은 1981년과 87년 두 차례 월드그룹에 올랐지만 전패를 당하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 높다란 벽을 한국이 낳은 최고의 테니스 스타 이형택이 허물었다. 이형택은 9일 새벽(한국시간) 독일 니더작센주 브라운슈바이크 폭스바겐홀에서 열린 독일과의 16강 원정 첫날 두 번째 단식 주자로 나서 세계랭킹 68위 플로리앙 마이어를 접전 끝에 3-2(7-5 6-3 1-6 6-7 6-3)로 누르고 월드그룹 첫 승을 신고했다.
쉽게 얻은 승리가 아니었다. 이형택은 폭스바겐홀을 가득 메운 3,500여명의 독일 홈관중의 열광적인 응원을 뒤로 한 채 외로운 승부를 벌여야 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는 데이비스컵이 주는 부담감도 컸다. 대표팀의 에이스인 그가 무너지면 월드그룹 8강행은 꿈도 꿀 수 없기에 승리에 대한 중압감은 더욱 커졌다. 설상가상으로 3세트 직후 직후 오른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면서 승부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형택은 지난 해 말부터 오른 무릎이 좋지 않다.
하지만 13년째 프로 무대에서 뛴 풍부한 경험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였다. 이형택은 “2년 전 호주오픈에서 마이어에게 졌지만 지금은 당시보다 경험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지금 내 실력은 2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서른 두 살의 노장 이형택은 마이어와 3시간46분의 사투를 벌이고도 끄덕 없었지만 25세의 마이어는 5세트부터 종아리에 쥐가 나 다리를 절뚝거렸다.
한국 대표팀은 이형택이 2번 단식에서 이겼지만 첫번째 단식에 나선 안재성(329위)이 독일의 톱랭커인 필립 콜슈라이버(28위)에게 0-3으로 완패하면서 1승1패가 됐다. 복식과 남은 두 번의 단식에서 2승 이상을 해야 8강행이 가능하다.
전영대 대표팀 감독은 “독일 선수들의 랭킹이 워낙 높아 8강행을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테니스강국 독일과 이렇게 대등한 경기를 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선수들이 자랑스럽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브라운슈바이크(독일)=김기범기자 kik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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