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나라당의 공천갈등을 보면서 박근혜 전 대표의 힘을 다시금 실감했다. 고작 자파 중진 1명이 당규에 저촉돼 공천신청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이유로 30명이 넘는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겠다고 협박하고, 화들짝 놀란 이명박 당선인측과 강재섭 대표가 멀쩡한 당규를 다시 해석하겠다며 그들을 달랜 것은 박 전 대표의 힘이 없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힘이 있으면 억지도 통한다는, 결국 정치판을 움직이는 것은 힘과 이해관계라는 현실을 보여준 블랙 코미디였다.
실제 개인의 정치적 역량으로 본다면 박 전 대표는 단연 이 당선인 다음이다. 그는 탈당을 해도 4월 총선에서 20석(원내 교섭단체) 이상의 의석을 차지해 제대로 된 독자 신당을 꾸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진다. 과반 의석확보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있는 이 당선인측으로선 박 전 대표의 동향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측근 의원들에 의해 막무가내로 휘둘러졌던 박 전 대표의 힘이 상당부분 정치윤리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은 법과 원칙, 약속에 상대적으로 충실한 처신이었다.
'박근혜 정치'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평을 들은 것도 그래서다. 그의 인기는 지난해 8월 경선현장에서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여러 번 고비를 맞은 이 당선인 곁을 변함 없이 지킴으로써 절정을 이뤘다.
그러나 이런 박 전 대표의 힘을 뜯어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내 바닥을 기고 있는 우리의 정치윤리와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냉정히 따지면 박 전 대표가 한 일이란 별 게 아니다.
학교에서 정치경제 또는 윤리 과목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아주 당연한 수준이다. 진 사람이 승복하고 당의 집권을 위해 승자를 도왔다는 건 정당 정치가 궤도에 오른 나라에선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기초 윤리도 국민에겐 새롭고 감동적이다. 정당과 이념의 울타리, 신의와 상식, 최소한의 책임감을 뭉개버리는 반칙이 보통으로 여겨지는 게 요즘 정치판이다. 지난 대선에서 절차 민주주의는 질식했다. 가장 큰 사고를 쳤던 두 사람은 예비 야당의 대표와 총재가 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 정치를 외치고 있다.
이 당선인이 아직까지 정치윤리 회복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쉽다. 정치윤리의 실추가 부른 정치 불신과 혐오를 그대로 두고서는 국정을 매끄럽게 이끌 수 없다. "정치는 원래 요지경이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라는 냉소가 퍼져 있는 한 국론을 모으는 정치는 작동하기 어렵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총선 때마다 적지 않은 물갈이 공천이 이뤄졌지만, 정치의 격이 나아지지 않은 것은 그 틀인 윤리문제는 놔두고 사람만 바꿨기 때문이다.
이 당선인이 말한 '탈(脫) 여의도 정치'도 인적 쇄신 보다는 정치 풍토의 개혁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믿는다. 먼저 이 당선인의 수범으로 윤리 기준을 높여야 함은 당연하다.
또 반칙 정치인을 용인하고 지지하는 지역정서, 국민의식을 단박에 바꾸는 게 비현실적이라면 반칙을 예방하거나 철저하게 응징하는 제도를 동원해야 한다. 법으로 도덕과 윤리 문제를 재단하는 게 어색하다는 이유로 회피한다면 만날 이 타령일 수밖에 없다.
유성식 정치부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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