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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 술과 친구 그리고 영화를 좋아했던 길종 형은 나의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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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 술과 친구 그리고 영화를 좋아했던 길종 형은 나의 우상

입력
2008.02.0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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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종형이 좋아하는 것은 무조건 따라 하였다. 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다. 나는 싸우는 게 싫어서 태권도는 안 배웠지만 야구광이 되었다. 우리는 동네 기왓장과 유리창을 많이도 깨먹었다.

그 덕에 나는 1977년 영화 <자, 지금부터야> 에서 군산상고 최관수 감독 역으로 출연, 아시아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기쁨도 누렸다.

형은 정말 독하고 깡다구였다. 대학입시를 앞두고는 학교도 가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여 식사하는 밥상을 방에 가져다 놓고 연탄불을 빼고 냉방바닥에서 꼬박 3개월을 밤새워 공부했다. 고교 3년간의 교과서, 참고서, 영어사전을 쌓아놓고, 외운 것은 몽땅 입 안에 넣어 삼켰다. 그리고 서울대를 2등으로 들어갔다.

나도 형을 따라 하다가 덩달아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형은 곧 가정교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는 형의 봉급날이 늘 기다려졌다. 형은 어김없이 과자와 과일을 잔뜩 사 들고 왔다.

그리고 장군 아들을 가르친 덕에 셰퍼드 새끼 한 마리를 선물 받아 한 이불 속에서 셋이 오붓하게 지냈다. 우리는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간 개 이름을 따 녀석을 벨카라고 불렀다.

형은 술과 친구를 몹시 좋아했다. 친구들과 세검정 골짜기로 막걸리를 독째 메고 올라가 마시기도 했다. 나의 중1부터 고3까지 교통비와 용돈은 형의 몫이었다.

밤에 걸려오는 형의 전화는 술집에 잡혀있다는 SOS 사인이었다. 드디어 큰형의 통금령이 떨어졌다. 큰형은 동생들이 잘못될까 봐 여자는 오후 8시, 남자는 오후 10시까지 들어오게 하고 그 이후에는 대문을 잠갔다.

벨카는 형의 발자국 소리를 가장 빨리 알아채고 내 얼굴에 꼬리를 흔들어 졸고 있는 나를 깨웠다. 나는 재빨리 담 밑으로 가 담장을 넘어오는 그를 부축, 이불 속에 넣고는 구두를 방문 앞에 놓았다.

가장 일찍 일어난 큰형은 방문 틈으로 우리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곤 빙그레 웃으며 댓돌 위에 뒤집혀 놓인 길종형의 구두를 바로 놓아줬다. 영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중 주인공 최호가 젊은 시절 밤늦게 집에 들어올 때 하숙생들 깰까 봐 담장을 넘어오는 장면은 그 때의 에피소드를 인용한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차츰 형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주말이면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느라 나하고 야구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영화감독 꿈은 그 때부터 싹텄다고 본다. 그는 곧 문리대 극회를 조직해 극작하고 연출한 작품을 KBS TV 대학방송극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입학 1년도 안돼 대학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대생들의 전화가 숱하게 걸려왔다. 각양각색의 리본이 달린 편지가 날아왔다. 영화 감독들이 형을 영화에 출연시키기 위해 수없이 찾아왔다. 그는 <마부> 의 강대진 감독에게 "내가 영화를 한다면 감독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여대생들은 내가 형의 최측근 실세인지 벌써 알아차렸다. 그를 만나기 위한 작전이 모두 내게 향했다. 내가 학교에서 들어오는 길목은 미모의 여대생들의 연애편지와 선물세례로 전쟁터였다.

나는 선물꾸러미를 받는 중독에 걸렸다. 각양각색의 초콜릿을 입에 넣고 달콤한 연애편지를 읽는 재미에 매일 밤이 즐거웠다. 때로는 마음에 드는 여대생을 골라 형 모르게 데이트도 즐겼다.

형은 남자 친구도 많았다. 거의 문학 하는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을 집으로 잘 몰고 왔다. 지방 출신 아니면 주머니가 빈 친구들이었다. 내 잠자리는 자주 형 친구들 자리였다. 형 친구들이 내 잠자리를 빼앗아도, 아무리 심부름을 시켜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나는 형 친구들을 형을 대신해 만나고 있다.

그들도 나를 보면 길종이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당시 친했던 친구들은 시인 김지하, 소설가 김승옥, 불문학자 곽광수, 언론인 주섭일, 외교관 박신일, 시인 정현종 등 한국 문화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다.)

어느 날부터 형과 그의 패거리는 아지트를 대학교수 연구실로 옮겼다. 캠퍼스 수돗가는 그들의 세면장이요, 문리대 앞 개천은 그들의 목욕탕이었다. 그들은 밤마다 그곳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암울했던 자유당시대의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해 방송작가 한운사 선생이 <가슴을 펴라> 를 썼고 그것이 라디오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쳤다. 하길종 감독은 그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에서 뼈아팠던 그의 대학시절의 체험을 잘 묘사했다.

1959년 말.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극도로 심해지면서 사회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형은 내게 옛날 이야기 대신 사회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자유와 평등, 부정과 부패가 무엇인지 등. 중학생이 된 나는 어떤 이야기보다도 그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매일 밤 나는 형의 그 이야기를 듣기위해 통금시간이 넘어도 졸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큰형이 길종형이 돌아올 때까지 자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형의 외박이 시작됐다. 나는 두려웠다. 드디어 나는 형을 찾아 나섰다. 대학 캠퍼스에도 그는 없었다. 무교동 단골술집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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