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에 가기 전 5만분의 1 지도를 꺼내 들었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이라는 간결한 시구(詩句)로 오지의 아우라를 담뿍 담고 있는, 경북 봉화의 궁벽한 곳에 숨은 승부역. 지도에서 승부역을 찾아보니 주변 산세가 녹록치 않다.
빼곡하게 엉겨붙은 등고선이 꽤나 급한 사면의 산들로 이뤄져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 급경사의 산들 사이 협곡으로 강물이 돌아나가고, 그 강물을 따라 철길이 이어졌다. 험한 산세가 슬쩍 무뎌지는 약간의 열린 공간에 들어선 승부 마을. 산으로 둘러싸인 창공, 그 ‘세 평의 하늘’을 만나러 승부로 떠났다.
춘양에서 올라가는 열차는 현동, 임기, 분천역을 지난다. 열차 창 밖은 지난 밤 내린 눈으로 눈부시다. 열차는 하얀 철길을 따라 눈덮인 산자락을 훑으며 전진한다. 물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순백의 철길도 굽이굽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눈 쌓인 밭두렁을 지나고, 캄캄한 좁은 터널을 통과했다.
승부역은 하루 6번 동대구와 강릉을 잇는 영동선 무궁화호가 서는 작은 역이다. 태백의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철암-영주를 잇는 영암선이 개통될 때(1955년) 생겨난 역사다. 이후 철길은 철암선, 황지본선, 강원북부선 등과 합쳐져 1963년 영동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암선이 뚫린 것은 휴전 직후. 험준한 산을 통과하느라 교량이 55개, 터널이 33개나 필요했다. 전쟁 발발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고, 군 공병대까지 투입해야 했던 우여곡절을 지닌 대역사였다. 드디어 개통되던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승부역을 찾아와 친필을 새긴 영암선 개통비를 역사 한쪽 언덕에 세웠다.
승부역이 유명해진 것은 1998년 겨울부터 시작된 환상선 눈꽃열차 덕분이다. 태백 추전역에 잠시 들른 눈꽃열차는 이곳 승부에서 1시간 30분 이상을 정차하고, 승객들은 산골 오지의 정취를 흠뻑 들이마시고 떠난다.
역사 옆쪽 바위에 승부역의 트레이드 마크인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다/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글귀가 흰 페인트로 씌어있다. 1965년 이곳에 근무했던 역무원 김찬빈씨가 쓴 구절이라고 한다.
승부역을 끼고 있는 승부리 주민들은 40가구 70여명 정도. 역에서 70m 길이의 출렁다리를 건너 만나는 승부마을과 역사 바로 옆 역동네를 묶어 1반, 승부마을에서 보면 강 건너편 초등학교가 있던 학교마을이 2반, 그리고 석포 쪽으로 한참을 나가 만나는 결둔마을이 3반 해서, 3개의 반으로 이루어졌다.
낙동강 건너편인 학교마을은 강원 울진에서, 경북 울진, 다시 경북 봉화로 행정구역만 3번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창 때는 100여 호 500명 가까운 주민이 살던 곳이었지만 여느 시골처럼 젊은이들이 등지면서 마을은 자꾸만 작아져 갔다.
고냉지 채소와 잡곡 농사를 짓고 사는 주민들은 겨울이 가장 반갑다. 마을을 찾는 눈꽃열차 손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역사 아래 강변에는 울긋불긋한 천막이 들어서있다. 마을에서는 ‘젊은 축’인 50~60대 마을 사람들이 눈꽃열차 손님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음식점 천막이다. 눈꽃열차시간이 가까워 오면 70~80세 된 노인들도 집에서 담근 장과 직접 수확한 깨와 콩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다. 한 푼 두 푼 용돈 버는 재미도 그렇지만 시끌벅적한 사람 사는 재미를 느끼는 게 더욱 크다.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열차역까지의 미끄러운 눈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승부역은 철길로만 외부와 연결된 건 아니다. 석포, 태백으로 이어지는 길이 낙동강 상류를 따라 놓여져 있다. 포장되기 전 이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주민들은 “예전에는 지에무씨(GMC)나 댕길 수 있던 길이었지. 일반 차로 가려면 땅이 질어 차 타고 가는 시간보다, 차를 떠밀어 주는 시간이 더 걸렸어”라고 했다.
이 길이 7,8년 전 깨끗이 포장됐다. 승부에서 석포까지는 12km. 눈 많은 날에는 미끄러워 차량 운행이 부담스럽지만, 설경을 즐기며 걷기엔 최적의 코스가 된다.
눈꽃열차가 도착하기 전, 부산해질 승부역을 피해 석포까지의 눈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골 시골마을은 대낮임에도 정적이 감돌았다. 집 앞에 묶여있던 큰 개만 컹컹 짖어대는데 가볍게 겅중겅중 뛰는 폼이 경계한다기보다 오랜만의 인기척에 반가워하는 몸짓이다.
소복하게 눈을 이고 흐르는 강물. 쾌활함 가득한 물소리에서 발걸음은 활기의 리듬을 얻는다. 간혹 강을 스치고 지나는 화물열차나 여객열차의 굉음만이 눈길에서 들을 수 있는 소음일 뿐, 강변 길을 걷는 내내 물소리와 벗하며 설경에 빠져들어갔다.
열차의 창 밖으론 그저 스쳐지나야 했던 눈세상을 한 발짝 한 발짝에 꾹꾹 눌러 담는 유쾌한 눈 트레킹이다.
■ 길에서 띄우는 편지
이번 겨울 들어 승부를 찾은 건 이坪?처음은 아닙니다. 흰 눈 소복한 승부마을을 기대하며 많은 눈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12월의 끝자락, 서울은 물론 태백 봉화 지역에 큰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승부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승부의 하늘은 눈은커녕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습니다. 먼 길을 허탕치게 한 기상청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눈 없는 승부의 겨울 풍경은 스산하고 황량하기만 했습니다.
환상선 눈꽃열차가 통과하면서 승부가 그 이름을 세상에 알린 지 이제 10년이 됐습니다. 제법 관광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승부마을이 최근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경북도가 '낙동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승부역 일대를 '코리아 산타 빌리지'로 조성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핀란드의 산타마을을 벤치마킹해서 신비의 판타지 마을로 만들겠다는 계획입니다. 어린이를 타깃으로 가족 관광객을 끌어모으겠다는 의도인데, 글쎄요. 저는 걱정이 앞서네요.
주민들 얘기를 들어보면 승부에는 2월이 돼야 눈이 제법 쌓인다고 합니다. 제가 눈이 부족했다고 불평했던 올 1월도 그나마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내렸다는 겁니다. 산타의 달인 12월 이곳 승부에서 눈을 구경하기는 더욱 힘든 실정입니다. 결국 눈 없는 산타마을이 된다는 건데요.
눈 없는 환상선 눈꽃열차가 지루하기만 한 '환장열차'라는 불만이 쏟아지는 판에 눈 없는 산타마을에 누가 가고 싶어할까요. 스키장처럼 마을 곳곳에 수백, 수천의 제설기를 설치해 눈을 뿌리든가, 아니면 크리스마스를 승부에 눈이 많이 오는 계절인 2월로 옮기지 않고서야 '코리아 산타 빌리지'가 제대로 성공하겠습니까.
주민들은 그래도 산타마을 개발 소식을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마을이 죽어가는 것보다는 어떻게라도 개발이 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죠. 평지가 드문 곳이다 보니 3개 마을 중 한 곳을 몽땅 개발 대상지로 내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주민들은 쥐꼬리 만큼의 보상을 받고 마을을 떠나야겠죠. 산타마을 개발 계획을 보면 주민들이 참여하고, 주민들 수입도 보장해 함께 잘 살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눈에 띄질 않습니다.
이름도 거창한 '코리아 산타 빌리지' 프로젝트가 우리네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은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순박한 노인들의 소박한 인심마저 쓸어간 뒤 '눈 없는 산타마을'이 실패로 끝난다면 그건 정말 걱정되는 일입니다.
■ 여행수첩
▲승부역에는 영주 방면 무궁화호가 오전 8시22분, 오후 7시58분, 8시28분에 정차한다. 반대 석포 방면은 오전 7시37분, 10시12분, 오후 7시39분에 정차한다.
▲차를 이용할 경우 경북 봉화군 춘양역에서 열차로 갈아타 승부에서 트레킹을 하고 승부역이나 석포역에서 다시 열차로 되돌아 오거나, 차로 태백을 거쳐 석포역까지 간 후 승부역까지 낙동강 상류를 따라 트레킹을 하고 되돌아 오는 방법이 있다.
▲답사전문 승우여행사가 내놓은 승부역 오지 트레킹과 협곡열차 패키지 상품을 이용할 수도 있다. 태백의 구문소를 보고 석포역 인근에서 출발해 낙동강을 따라 눈길 트레킹을 한 후, 승부역에서 춘양역까지 열차로 이동한다. 매주 토요일 서울에서 출발(오전 7시30분)하는 당일 일정이다. 참가비 4만3000원. (02)720-8311
* 한국일보 포토온라인저널(http//photoon.hankooki.com)에서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봉화=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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