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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3> 앨버커키-리오그란데, 또는 박제된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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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3> 앨버커키-리오그란데, 또는 박제된 원주민

입력
2008.01.3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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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뉴멕시코 전체가 그럴 테지만, 이 주(州)의 최대도시 앨버커키도 세 문화의 표본실이었다. 그 표본실을 채우고 있는 문화들은 본디 이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 문화, 대서양을 건너 이곳에 처음 제 나라 깃발을 꽂은 스페인 사람들 문화, 뒤늦게 이곳을 손아귀에 넣은 앵글로색슨족 문화다.

그러나 앨버커키가 이 문화들의 도가니 노릇은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이 도시의 세 문화는 서로 녹아들지 못하고 서먹서먹하게 이웃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다른 지역처럼 얼추 계급 분단선에 맞춰서 말이다. 그 문화적 계급적 분단선은, 역시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언어 분단선이기도 했다. 거의 소멸해 버린 원주민 언어들을 제쳐놓으면, 이곳에서도 영어는 유산자의 언어였고 스페인어는 무산자의 언어였다.

문화들의 그 분단선은 앵글로색슨 문화와 다른 두 문화 사이에 특히 또렷이 그어져 있는 듯했다. 다시 말해 스페인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뒤섞인 정도에 비해, 이 두 문화와 앵글로색슨 문화가 뒤섞인 정도는 작아 보였다.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와 달리 잉글랜드 문화와 스페인 문화가 유럽 기독교문화라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앵글로색슨문화 대 원주민-스페인 문화의 양립은 기이하게 보인다.

■ 영어는 유산자, 스페인어는 무산자의 언어

이 기이한 양립은 원주민과 외래 정복자 사이의 통혼 정도와 관련 있는 것일까?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들이 잉글랜드에서 온 정복자보다 원주민들에게 덜 잔인했다는 증거는 없지만(실상 역사에 기록된 가장 끔찍한 원주민 학살들은 주로 스페인 군인들이 저질렀다),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들과의 결혼을 크게 꺼리지 않았던 것 같다.

스페인이 정복했던 지역(대충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라 부르는 지역과 미국 남서부 지역. 이를 편의상 ‘새로운 스페인’이라 부르기로 하자)에는 메스티소라 불리는 원주민-백인 혼혈인들이 매우 흔한 데 비해, 잉글랜드가 정복한 지역(오늘날 미합중국과 캐나다의 대부분 지역. 이를 편의상 ‘새로운 잉글랜드’라 부르기로 하자)에는 혼혈인들이 비교적 드물다.

새로운 잉글랜드에 살고 있던 원주민 수가 새로운 스페인에 살고 있던 원주민 수보다 본디부터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실상 유럽 문명이 파괴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위대한 문화는 대체로 새로운 스페인 안에 있었다.

그러나 미합중국 역사의 첫 한 세기는 새로운 잉글랜드가 대서양 연안(얼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넓어지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백인 ‘개척자’들은 무수한 원주민 집단과 맞닥뜨렸을 테다. 그런데도, 오늘날 미합중국의 원주민-백인 혼혈인 비율은 라틴아메리카의 혼혈인 비율에 견줘 턱없이 낮다.

게다가 라틴아메리카에는 원주민(인디오)이나 메스티소들이 주류인 나라들이 있지만, 미합중국의 어느 주에서도 원주민은 극소수 인종이다. 뉴멕시코주를 비롯해 본디 새로운 스페인에 속했던 지역들에서나 그럭저럭 보호구역 안의 공동체를 이뤄 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새로운 스페인에서보다 새로운 잉글랜드에서 원주민 학살이 외려 더 큰 규모로 이뤄졌음을 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잉글랜드 백인들의 순혈의식이 새로운 스페인 백인들의 순혈의식보다 높았음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혈의식의 정도가 문화의 융합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박제로 살거나, 빈자로 살거나

앨버커키로 돌아가자. 이 도시 이름은 1660년 이곳에 마을을 세운 스페인 군인 알부르케르케 공작(1619~1676)에 연원을 두고 있다. (철자는 똑같지 않다.

도시 이름은 Albuquerque고, 이 도시에 제 이름을 준 스페인 군인 이름은 Alburquerque다. 스페인 군인 이름에 r이 하나 더 있다.) 앨버커키와 그 둘레 원주민 문화는 시내의 인디언 푸에블로 문화센터에 박제돼 있었다. 그리고 그 문화는 두 겹의 필터를 통해서 관람객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첫 번째 필터는 그 문화에 이름을 붙이고 대상화한 스페인 사람들의 의식이고, 또다른 필터는 스페인어로 기록된 그 문화를 영어로 옮긴 앵글로색슨 사람들의 의식이다. 요컨대 그 문화센터의 원주민 문화는, 의례적 상찬이 곁들여지긴 했지만, 정복자들의 눈에 비친 문화였다.

‘푸에블로’는 스페인어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상 앨버커키 둘레에는 푸에블로라는 이름이 붙은 취락이 여럿 산재해 있다. 죄다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들의 문화만이 아니라 삶도 박제돼 있는 것이다.

그들은 푸에블로에 갇혀 주(州) 정부의 보조로 약간 넉넉하게 살거나 도시로 나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도시로 나오는 원주민은 대체로 젊은이들이다. 이런 원주민 젊은이들 때문은 아니지만, 앨버커키는 미국에서 가장 젊은 도시에 속한다. 앨穉옮?국제방문자센터의 한 직원은 내게 이 도시 주민의 평균 연령이 28세라고 알려 주었다.

그 곳 원주민 지아(Zia) 족의 성스러운 상징이었다는 태양은 뉴멕시코 주기(州旗)만이 아니라 앨버커키 이 구석 저 모퉁이의 데커레이션 속에서 사방으로 빛을 뿜으며 이 도시의 젊음을 뽐내고 있었다.

앨버커키와 그 주변에서 들른 언론사들도 이 도시의 다문화성에 걸맞았다. <엘 이스파노 뉴스> 는 스페인어 신문이었고, 지역 공영 라디오방송 KUNM은 원주민들을 청취자로 삼는 콜인쇼를 하나 내보내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 진행자인 할런 맥카사토씨 역시 원주민이었다. 언론사의 규모도 대개 작았다. 앨버커키 근교 코랠리스에서 나오는 <코랠리스 코멘트> 는 전직 AP 기자 제프 래드포드씨가 발행인 노릇에서 기자 노릇까지(그의 말로는 청소부 노릇까지!) 도맡아 운영하는 일인신문이었다. 그는 블로그가 아니라 종이신문을 혼자 만들어내고 있었다!

댈러스의 프라이스 헬럼스 여사가 그랬듯, 앨버커키에서도 이곳 국제방문자센터의 자원봉사자 주디스 베넷씨가 자기 차로 여기저기를 데려다 주었다. 그녀의 부모는 유대계 러시아인 이민자였고, 그녀는 뉴욕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당신이 앨버커키의 다문화성을 마무리하는군요”라고 말하자 주디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들이 곧잘 범하는 실례로 그 웃음을 중간에 끊었다. 나는 뜬금없이 “그런데, 결혼하셨어요?(By the way, are you married?”)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 때는요(I was).” 라고 대답했고, 3초쯤 침묵이 흘렀다. 미국인이라고 해서 죄다 자신의 이혼 얘기를 대범하게 하지는 않는구나….

그 때 우리가 개울 너비의 물줄기를 지나고 있지 않았다면 어색함이 조금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저 개울 이름이 뭐에요?” 라고 내가 묻자 “리오그란데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놀라움을 과장해 되물었다. “정말 저게 리오그란데라고요? 존 웨인이 넘나들었던?” “맞아요, 바로 그 리오그란데.”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리오 그란데가 아니라 리오 페케뇨군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리오그란데는 스페인어로 ‘큰 강’이라는 뜻이고, ‘리오 페케뇨’는 ‘작은 강’이라는 뜻이다. 리오그란데강은 길이가 3,000km가 넘는다니 폭이 넓은 곳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앨버커키에서 본 리오그란데는 파리의 센강보다도 더 조붓한 개울이었다.

가이드를 맡은 L 선생이 차를 몰아 하루는 샌타페이와 로스앨러모스를 들렀다. 차창 밖으로 보는 뉴멕시코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어떤 시골을 문득 연상시켰다. ‘메사’(스페인어로 ‘테이블’이라는 뜻이다)라고 부르는, 황량한 고원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뉴멕시코의 메사는 안달루시아의 황무지보다 더 황량해 보였다. 아무튼, 그 옛날 이곳을 처음 찾은 스페인 사람들이 굳이 이 땅에 욕심을 낸 것은 제 고향 사막의 황량함을 이곳에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잠시 상상했다.

■ 춥고 그늘진 모습의 원주민, 날 닮은 듯

샌타페이는 동화 속 도시였다. 몽환적으로 예뻤다는 뜻이다. 제네바의 레망호 주변을 되돌아보면서도 이 표현을 쓴 바 있어서 되풀이하는 게 스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샌타페이는, 도시가 작은 탓도 있겠지만, 특정한 구역만이 아니라 전체가 동화였다. 내가 갔을 땐 겨울 동화였다. 지대가 높아서 그랬는지 앨버커키보다 한결 춥게 느껴졌다.

그 추위에도, 좌판을 벌여놓고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들은 원주민이거나 메스티소로 보였다. 자기들끼리는 능숙한 스페인어로 얘기했고, 관광객들에겐 어설픈 영어로 얘기했다. 그들의 얼굴은 내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들의 추위는 내 추위였다.

나는 서울의 친구들에게 줄 생각으로 터키석이 박힌 팔찌를 몇 개 샀다. 터키석은 샌타페이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다. 길거리에서 물건을 살 땐 흥정을 해야 하는 법이지만, 나는 그들이 부르는 대로 값을 다 치렀다.

흥정을 하는 것이 왠지 결례인 듯싶었다. 샌타페이(본디의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산타페’)는 ‘거룩한 믿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샌타페이의 춥고 그늘진 원주민들 앞에 서 있는 내게 믿음은 더 이상 거룩해 보이지 않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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