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그대로 한국영화 진흥 전반을 담당하는 기구다. 관료성, 비전문성을 버리고 영화인 스스로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정책에 담아야 한다는 취지로 김대중정부가 1999년 5월 28일 민간 주도의 행정위원회로 출범시켰다. 영진위는 한국영화진흥사업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다.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을 돕고, 한국영화 투자조합에 출자하고, 한국영화의 국제영화제 참가도 도와 준다. 영상문화 기반조성을 위해 영상미디어센터를 건립하고 예술영화전용관을 지원하며, 영화전문인력 양성과 조사연구사업도 벌여왔다.
▦한국의 영화진흥기구 역사는 1971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의 한국영화진흥조합도 민간기구 형태였다. 국산영화 제작비 융자사업, 대종상 및 우수영화 지원, 해외영화제 출품 지원 등 하는 일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진위가 그렇듯 민간협의체라고 해서 조합이 모든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사회 구성과 사업 승인을 정부(문화공보부)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사장의 전횡, 회원의 출연금과 예산집행의 불공평에 대한 반발로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국가기구로 바꿔 좀더 강력한 진흥책을 쓰자. 그래서 만들어진 게 1973년의 영화진흥공사였다. 정부가 직접 나선 것이다. 관심은 두 가지였다.
유신정권 정당화를 위한 국책영화 제작과 한국영화의 해외시장 개척. 당연히 사장과 이사도 정부가 임명했다. 현업종사자는 배제했다. 잡음을 없앤다는 취지였지만, 진짜 이유는 '통제 강화'였다. 그렇다고 모두 무능했던 건 아니다.
1988년에 취임한 김동호 사장처럼 유능한 인물도 있었다.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인 그는 당시의 인연과 경험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대부분은 정실, 보은 인사로 채워졌다.
▦영진위라고 다르지 않았다. 시작부터 영화계 갈등과 인선 불만으로 위원들이 불참하고, 위원장이 사퇴하면서 두 차례나 파행을 맞았다. 그것을 치유하지 않은 채, 코드인사와 편의적 자세로 10년을 이어온 영진위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출렁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일부 영화인들은 영진위가 '그들만의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감독협회는 최근 영진위 해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제작지원금의 속내,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대응, 일부 간부들의 장기집권과 안하무인격 처신 등을 보면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 역시 문제는 사람이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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