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여러명 동시 대면으로 범인 식별절차 지켜야"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용의자와 비슷한 한 사람만을 피해자에게 제시해 용의자로 확정된 경우 유죄 인정의 근거가 될까.
2006년 8월 부산의 한 가정집에 괴한이 침입, 당시 9살이던 A양을 성폭행했다. A양은 “피부가 검고 회색 반팔 티를 입었고, 얼굴에 점은 없지만 나이는 아버지(42세) 보다 들어 보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관내 성범죄 경력자 중 47명을 추려냈고, 사건 발생 25일 뒤 이 사진들을 A양에게 보여줬다. A양은 김모(63)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김씨는 피부가 아주 검은 편은 아니고 얼굴에 사마귀도 있었다. 경찰이 제시한 47명 사진 중에서는 김씨 등 2명만이 A양 진술처럼 회색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40여일이 지난 뒤에야 김씨를 검거했다. 경찰은 김씨 동영상을 찍은 뒤 A양에게 제시했고, 역시 A양은 김씨를 범인이라고 했다. 이후 경찰 범인식별실에 김씨 등 용모가 비슷한 3명을 모아놓았고 A양은 또 김씨를 지목했다. 1심은 김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지만, 2심은 범인 식별 절차의 잘못을 지적하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 역시 김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재판부는 “용의자 한 사람 또는 사진 한 장을 제시해 범인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사람 기억력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신빙성이 낮고, 제시된 인물이 범인이라는 암시를 목격자에게 줄 수 있다”며 “범인 식별 절차의 신빙성을 높이려면 인상 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동시에 대면시켜 범인을 지목하도록 하는 등의 절차를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고주희 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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