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점령과 한국전쟁 등 질곡의 역사를 경험한 내게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건 바로 ‘먹고 사는 문제’였다. 광복과 함께 자유가 찾아왔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서 만큼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하는 이념 논쟁은 오히려 내게 사치였다.
내 무역인생의 출발은 1945년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홍콩에 첫발을 내디딘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가 현실로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홍콩 경제는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먹을 것 하나 변변치 못했던 한국과 달리 홍콩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말로만 듣던 중국 광동 지방의 화려한 음식이 주문만 하면 줄지어 나왔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홍콩에서 터만 잘 닦으면 무역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홍콩은 상하이, 베트남 교포들도 옮겨와 무역을 할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장이었다. 나를 비롯한 ‘화신’의 박흥식, ‘건설실업’의 김익균 등이 홍콩무역을 주도했다. 오로지 자기자본으로 무역을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피폐한 한국 사회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울릉도에서 잡은 오징어를 말려 포항과 부산, 인천을 통해 홍콩으로 실어가는 게 수출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무역업을 하던 나에겐 기회였다. 홍콩과 상하이에 구축해놓은 인맥을 통해 돈이 될만한 상품이면 무엇이든 수출했고, 그 돈으로 다시 한국에 필요한 상품을 들여와 되팔았다. 오징어와 텅스텐을 홍콩에 수출한 돈으로 페니실린과 양복감을 들여왔고, 이를 되팔자 서울의 집 몇 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돈이 수중에 떨어졌다.
무역업을 하던 내게 또 하나의 큰 재산은 바로 정보력이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세계 정세를 안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미국 정세를 알려면 서울 광화문전화국에서 종일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만큼 세계를 향한 정보는 차단돼 있었다. 나는 정보가 곧 돈이자 힘이라는 것을 깨닫고, 홍콩에서 터를 잡은 육국반점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이 곳은 각국의 무역인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세계 각국의 정보가 교환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다른 무역상보다 더 좋은 상품을 더 좋은 가격에 거래할 수 있었다.
홍콩을 오가던 내게 가장 큰 고충은 식사였다. 산해진미가 펼쳐진 홍콩이었지만, 광동식의 기름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괴로웠다.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해결책이 바로 고추장. 한국에서 고추장을 가져와 기름진 음식과 함께 먹으니 살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육국반점 지배인이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젓가락이 너희 방에만 들어가면 빨갛게 물든다. 도대체 무슨 음식을 먹기에 그러느냐”고 따져 물었다. 방안에 있던 나와 친구들은 박장대소 했다. 매일 시뻘건 고추장을 먹으니 상아로 만든 젓가락이 물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일을 겪은 후 나와 친구들은 상아 젓가락 대신 나무 젓가락으로 대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무한한 가능성이 보였던 홍콩 시장도 어느새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각국의 무역인이 점차 늘어나면서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그나마 홍콩의 무역 대리인이 뒷골목 생활을 철저히 조사, 우리가 수출할 수 있는 물자를 정확히 알려줘 연명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된 수도관을 녹여 만든 아연과 오징어, 계란이 수출 물자의 전부였다. 이마저도 중국과의 무역 다툼으로 순탄치 않았다. 우리에겐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눈에 들어온 나라가 마카오였다. 하지만 범죄자와 스파이의 나라인 마카오에서 정상적인 무역 활동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아쉽지만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침을 겪던 무역 활동에 첫 번째 위기가 왔다. 고국에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 인민군이 쳐들어 왔고, ‘돈 되는 모든 것’들을 북으로 실어가기 시작했다. 홍콩에서 수입한 페니실린과 신문용지, 화공약품 등을 북한군에게 모두 빼앗기는 바람에 한 순간에 빈털터리가 됐다.
눈앞이 캄캄했다. 맨손으로 이룩한 재산이 전쟁으로 송두리째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만 바라보는 가족들의 촉촉이 젖은 눈을 바라보며 다시 용기를 냈다. “아 살아야겠다.” 이 생각 뿐이었다. 무역은 둘째고 당장 살아 남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무조건 짐을 싼 채 가족들과 부산으로 향했다. 정처 없는 피난길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다시 무역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터를 잡고 살던 서울 종로구 돈의동으로 올라와 통신 기자재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체신부와 함께 전쟁으로 엉망이 된 통신시설을 복구했고, 이 때부터 무역을 제대로 하려면 생산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삼화제지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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