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회귀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그는 니체주의자라고 불려도 좋을 것 같다. 기아, 전쟁, 권력, 슬픔, 희생…. 세계가 진화해도 모든 것은 반복된다. 우리 모두는 역사의 순환고리에 갇혀 있다.
정치ㆍ사회적 현실을 독특한 영상 언어로 해석해온 전준호(39)의 개인전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이 18일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막했다. 지난해 뉴욕 페리루벤스타인 갤러리에서 전시를 갖는 등 해외 활동에 주력해온 탓에 국내에선 4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작품 수는 영상 9점, 조각 3점, 회화 1점으로 많지 않지만, 600평의 전시장을 채운 대형 작품들을 꼼꼼히 살펴보려면 한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연기 자욱한 쇼케이스 안에 갇힌 흑인 미식축구 선수의 동상. “그의 열정적인 심장은 영원히 기억되리라(His passionate heart will be enshrined forever)”는 문구를 비웃듯 동상의 가슴엔 싸구려 엔진이 박혀 있고, 등 뒤로는 작은 배연통이 쉴 새 없이 매연을 뿜어낸다.
‘땅 따먹기’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발상으로 만들어진 아메리칸 풋볼, 석화연료를 소비시키는 일회용 심장과 체스판의 종마처럼 부려지는 흑인 선수들. 가짜 기념비에 두 다리가 박혀 꼼짝 할 수 없는 ‘슬픈 영웅상’이다.
극사실주의를 뜻하는 하이퍼 리얼리즘을 제목으로 건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남북한과 미국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5개의 채널을 한데 묶은 동명의 영상작품. 파이프를 문 맥아더 장군의 모습에서 얼굴만 지운 후 “나는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를 외치는 맥아더의 육성을 합성한 애니메이션은 제국주의의 얼굴 없는 망령을 보여주고, 탈북자들의 월담 예행 연습장면을 무한 반복해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넘을락말락 하다 결국 떨어지고도 또 다시 담 넘기를 시도하는 안타까운 장면들을 통해 우리의 냉담한 가슴에 가시를 박는다.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100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김일성 생가로 피로에 지친 한 남자가 걸어 들어가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반복해 보여주는 작품은 한때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한과 후회를 담았다.
작가는 “이데올로기 자체나 반미주의는 관심이 아니다. 허탈하게도 신봉했던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 그것이 내 관심”이라고 말한다. 트리키(tricky)한 작업을 좋아해 재미있어 보이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유쾌하지만은 않은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고. “이라크나 북한, 아프리카의 참상을 보라.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기아, 전쟁, 권력투쟁, 이데올로기 싸움 같은 카테고리는 유사 이래 한번도 끊긴 적이 없다. 사조를 떠나 우리네 삶 자체가 지극한 하이퍼리얼리즘이다. 맥아더의 “I shall return”은 계속 실현되고 있다.”
전시장 입구의 CCTV에는 하얀 석고로 빚은 듯한 김일성 동상이 크게 클로즈업돼 있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보면 실제 작품은 공황장애 치료약인 알프라졸람 1년치를 빻아 만든 손바닥만한 미니어처다. 작가는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 동상 참배를 계속하는 건 그곳이 낙원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라며 “공황장애 약을 먹듯 거짓 희망을 통해 현실과 타협하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흔 살 전까지 뉴욕현대미술관(MOMA)이나 런던의 테이트모던 갤러리에 입성하지 못하면 끝이라는 압박감 속에 살아왔다는 작가의 자유의 여신상에 갇힌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뉴욕, 뉴욕, 하며 달려왔는데, 최고에 도달했다고 믿었던 그곳은 고작 관광명소인 자유의 여신상 머리 속이었다. 전체와 맞닥뜨릴 때 우리가 믿었던 작은 세상은 얼마나 허탈한가. 3월9일까지. (041)551-5100
천안=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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