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권한을 줄이고 개인의 자유를 늘리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지난 10년 간 정부가 '문화'에 대해 채택하고 집행한 정책들은 겹으로 그르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하다.
■ 정치ㆍ검열 부추기는 현행방식
대한민국 정부는 납세자들이 낸 세금을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에게,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지원하는 데 쓴다. 이런 일에는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기본 임무는 국토를 방위하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예술과 학문, 방송을 지원하는 일은 정부 본연의 기능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
다음으로'소득의 역배분'문제가 있다. 정부 지원을 받는 예술창작품을 즐기는 계층은 소득수준이나 교육정도가 전체 시민 대비 평균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전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부가 학자, 예술가를 지원하는 일은 또 다른 의미에서 부작용을 낳는다. 정부에 학문과 예술을 진흥할 의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지원하는 학자와 예술가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경우든 정부의 지원은 관료적 기구를 거치게 마련이다. 관료적 기구를 거치면, 시혜자와 수혜자 사이에 정치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학문이나 예술은, 스포츠처럼 기록이나 스코어를 통해 객관적으로 우열을 평가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므로'정치적 거래'를 통해 지원금을 타내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개인보다는 단체의 정치적 파워가 크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상식이므로 대개의 경우 정부지원금을 수주하는 경쟁은 예술창작이나 학문연구의 모습보다는, 또 개인 간의 경쟁이라는 모습보다는, '학술단체나 예술단체 사이의 힘겨루기'라는 형태로 변질되어 나타날 개연성이 크다. 예술인들이 창작에 전념하기보다는 성명서 발표 및 시위집회 참가 등 비예술적 활동에 힘을 쏟게 되는 것이다.
'정부의 지원'이라는 관점에서 사태를 살피면 또 다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학문이나 예술, 방송은 정부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본연의 임무와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어떤 형태라도 지원금이 오고 가면, 돈을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영향권 안에 편입되기 마련이다. 개성이 충만한 작품보다는 정부가 원하는 작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산권을 쥔 인사들의 의사를 거스르지 않는 작품들이 생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것은 일종의 '묵시적 검열'이다. 예술작품이 궁극적으로 유연한 사고와 자유로운 실험정신을 통해 발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묵시적 자체 검열'이 예술창작품에 끼치는 해악은 생각보다 그 크기가 적지 않을 터이다.
■ 국민 개개인의 선택권 존중을
이런 맥락에서 이명박 정부의 문화지원은 그 방향과 대상을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문화예술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연간 약7,000억 정도의 예산을 집행했다.
하지만 현행 지원방식은 납세자들이 아니라 특정 예술가와 학자들, 예산배분을 결정하는 몇몇 소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식이다.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마련한 정부의 예산이 국민 대다수가 아니라 특정 개인 몇몇을 위해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문화'에 대한 정부 예산은 어떤 경우든 국민 개개인의 선택권을 최대로 존중하는 방식으로 쓰여야 한다. 특정인의 선택과 취향을 다수에게 강요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취향과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사회가 미래지향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이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데 쓰이고 그런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의 경비로 전용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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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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