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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선명 진보라는 허울

입력
2008.01.21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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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계 핵심인 이해찬 전 총리와 유시민 의원이 손학규 대표체제에 반발해 대통합민주신당을 떠났다. 이 전 총리는 대표선출 방식의 비민주성을 문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한나라당 출신이 당 대표가 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듯하다.

유 의원은 신당에 자신이 꿈꾸었던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너무나 좁다면서 "유연한 진보 노선을 가진 좋은 정당을 만들겠다"고 탈당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그 역시 한나라당 출신이자 중도진보를 지향하는 손 대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정서가 강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장래는 매우 불투명하다. 일부에서 친노 신당 창당 가능성을 점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얘기다. 이 전 총리측도 인정했듯이 창당에 필수적인 돈과 사람, 명분 등 세 가지 요건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조차 친노 신당엔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유시민 의원은 자신이 나고 자랐지만 적지나 다름 없는 대구 수성을에서 무소속 출마를 준비 중이나 그가 여의도로 생환할 가능성을 높게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 전 총리는 무소속 출마를 검토하고 있으나 정계은퇴까지 생각할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다.

■ 차이없는 이해찬 · 유시민의 진보

두 사람이 내세울 수 있는 최대의 기치는 선명한 진보, 선명한 야당일 것이나 막상 두 사람이 제시한 진보도 별다를 게 없다. 유 의원은 '개방을 통한 성장과 약자를 보듬는 복지가 함께 숨 쉬는 사회'를 자신이 실현하고 싶어하는 진보적 가치라고 했는데 손 대표가 추구하는 가치와의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그가 내세운 '유연한 진보'가 손 대표가 모색중인 새로운 진보와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한 설명이 없다.

이 전 총리는 탈당 회견에서 '인간의 존엄성, 성숙한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공동체의 가치, 민주진영의 정체성'을 자신이 지키고자 한 삶의 지향이라고 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의 지향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전 총리는 민주진영의 정체성이라는 대목에서 손 대표를 거부할 명분을 찾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대선결과는 국민들이 더 이상 정당을 선악 개념이나 정의와 불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은 50% 안팎의 국민이 지지하고 있는데 헌정사상 한 정당이 이런 지지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이런 변화를 깨닫지 못하면 국민들이 노망들어 보이는 것이다.

성장과 개방, 감세를 주장하는 한나라당 노선이 재벌과 돈 많은 자들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악이고 못 사는 사람들을 위해 분배와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진영의 노선은 선이라고 보는 견해도 이제 통하지 않는다. 두 노선은 서로 다른 가치에 기반하고 있을 뿐 선악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좌든 우든 고유한 노선만으로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선진국의 좌우 정당들이 중도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중도실용 보수를 내세운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진보진영이 지리멸렬 상태를 극복하고 견제세력이나 대안세력으로 거듭 나기 위해서는 선명 진보, 선명 야당의 허상에서 벗어 나야 한다. 우리와 같은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에서 순전히 진보 노선, 또는 보수 노선만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국가는 없다.

이 전 총리는 손 대표의 중도 노선이 결국 한나라당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보수 가치에서 출발한 중도와 진보 가치에서 출발한 중도는 엄연히 다르다. 물론 실용주의로 수렴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해찬 전 총리가 좋아하는 골프로 이야기 하자면 러프에 빠진 공을 숏 아이언으로 쳐내야 할지, 롱 아이언으로 쳐내야 할지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것이 실용주의다. 결국 보수에서 출발한 중도 실용주의와 진보에서 출발한 중도 실용주의의 대결이 될 수밖에 없다.

■ 진보실용주의 대 보수실용주의

노무현 대통령도 실용주의 진보 노선을 걸었으나 내가 옳고 너희는 틀렸다는 오만이 실패를 불렀다. 손 대표가 모색 중인 탈 이념의 새로운 진보가 유념해야 할 교훈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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