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국정원장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의 대화록 유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회견을 할 때, 대규모 간첩단사건이 발표되는 줄 알았다. 말투나 표정이 국가를 위해 드디어 크게 한 건 한 사람 같았다.
가훈이 의기양양인가? 어이가 없었다. 공인이라면 직분과 처지에 맞게 행동해야 할 텐데 도무지 상식과 책임감이 없으니, 원장 적임자가 아니라고 했던 전임자의 말이 맞은 셈이다.
■ 평생 정권 다투는 DJㆍYS
김 원장의 경우로 말문을 연 이유는 공인 중 최고위에 있었던 전직 대통령들에게 주문을 하고 싶어서다. 현직이 아니라도 당연히 그들에게는 직분이 있다. 현직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직분과 처지에 맞게 나라를 위해 행동해야 할 최고의 모델이 전직 대통령이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영향력이 가장 컸던 전직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집권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듯이 김ㆍ노는 일정한 의미에서 한 묶음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4명 중에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명박 후보 당선으로 정권이 바뀐 뒤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되살아 나는 양상이다. 그는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이 후보를 밀었고, 특유의 정치감각으로 이명박 당선을 확신하며 고비마다 지원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사실 17대 대선에는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세 전직 대통령이 다 출마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정권 쟁탈전에서 김대중만 패한 셈이다. 11일에 열린 YS 팔순잔치는 10년 전 IMF로 조용히 치른 칠순과 달리 대성황이었다. 염량세태의 극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서울의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DJ가 사는 동교동은 서교동으로 통합돼 없어지고 YS가 사는 상도 1동은 상도 5동까지 흡수해 더 커진 점도 우연이지만 재미있다.
그러나 YS의 ‘복귀’에는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 그 동안 그는 주장에서 막무가내였고 말투에 품위가 빠졌으며 발언에 내용이 없었다. 제발 가만히 계시라는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더구나 이 당선인을 지원한 동기가 정권 탈환 외에, 차남 현철씨의 4월 총선 공천ㆍ출마를 돕기 위한 것이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DJ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 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탈당, 창당, 통합등 범여권 이합집산의 단계마다 정도 이상으로 개입한 동기가 정권 유지 외에, 아들의 정치적 장래와 집안 보호라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적인 영향력과 관계없이 이 두 전직 대통령의 노욕과 품위 없음은 이른바 국격(國格)을 훼손하는 일이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은퇴하면서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만, 평생의 민주화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팔순이 넘어서도 정권을 둘러싸고 다투는 허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 달 남짓 지나면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이 나온다. 제일 젊고 가장 특이한 전직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울에 머무르지 않고 향리로 은퇴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가 봉하 뭐라는 온ㆍ오프라인 사이트를 운영하는 언론인이 될는지, 시민ㆍ사회단체의 지도자로 다시 나타날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 할 것이다.
■ 궁금한 노 대통령의 퇴임후
의미 있는 일을 의미 있게 하려면 좀 달라져야 할 텐데, 전임자들보다 더 말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니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명박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안에 대해서도 통폐합을 통한 대부처주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부조직 개편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공공부문 개혁에 대해서는 공감도가 대단히 높다. 시행상황을 지켜보며 비판해도 늦지 않다. 자신이 집권했을 때 반대세력이 느꼈던 실망과 좌절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끼리 주막 강아지니 뭐니 그런 비난이나 하고 여전히 정권 싸움을 한다. 나라와 사회를 위해 협력하고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좀 볼 수 없을까. 이제 우리에게도 존경할 만한 전직 대통령, 친근한 국가원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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