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새 정권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대선 과정에서 느낀 소감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활동을 통해 새 정부의 정책 의지에 관한 단편적 정보들이 나오고 있지만, 여기서도 문화를 이끌어갈 정책 방향을 읽기가 어렵다.
그저 어느 부처가 없어지느니, 어떤 부처가 어디로 통합되느니 하는 이야기만 무성할 뿐이다. 문화를 보는 시각이나, 문화 정책의 기본 방향과 철학을 어디에 두겠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 지식사회 기반은 개인 창조성
한반도 대운하로 표상 되는 이른바‘토건 국가’적 기획을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이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만 도드라질 뿐이다. 이런 토건 국가적 흐름을 보면 문화를 그저 생산을 위한 재충전 정도로만 인식하며, 언제든 희생 가능한 영역으로 취급했던 저(低)근대화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감추기 어렵다.
21세기 경제의 경쟁력이 문화에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정보사회에서 경제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 사람이 가진 창조성, 요컨대 문화란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를 절실히 느낀다.
대중문화와 문화산업 영역으로 좁혀보면, 창조성은 새로운 기획과 실험이 자유롭고 풍부하게 이루어질 때 생겨난다. 창조적 실험은 상업주의의 틀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시장논리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과 비판 정신이 충분히 발휘될 때 만개할 수 있다.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또 대중 음악이든 방송이든 문화상품은 경제적 교환가치의 대상인 동시에 문화적 삶의 자산이다. 문화상품이 호소력을 갖고 문화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대중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의 산업적 경쟁력을 높이는데 가장 필요한 창의력과 기획력은 대중이 가진 문화적 창조성의 잠재력을 끌어올려야만 가능하다.
이는 다시 문화적 삶의 질이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른바 정보사회, 지식기반 사회에서 요구되는 창조성은 개개인이 정보와 지식, 문화와 예술이라는 공공적 영역에 자유롭게 접근하면서 각자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때 높아질 수 있다.
한국사회의 문화 구조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문화산업에 돈이 부족하다든가 기술자원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시장 전반에 마이너리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분야에서 소수의 승리자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승자독식 구조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자원의 부족보다 효율적, 미래 지향적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대중음악에는 고만고만한 주류음악만 남아 있고, 천만 관객 영화가 시장을 장악하는 와중에 저예산 독립 영화가 살아남기 어렵다.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의 기반인 출판 만화는 고사 상태이고, 실험성 강한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이 설 자리는 없다. 이런 상황은 곧 문화적 다양성의 부족으로 나타나며, 창의적 인력 자원이 성장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로 나타난다.
■ 문화적 다양성 배려ㆍ육성해야
한국의 문화산업이 궁극적인 경쟁력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독점적 지위의 주류 산업에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너 시장이 풍부하게 자리 잡도록 공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이다.
이는 문화적 다양성의 확보와 직결된다. 1990년대 이래 문화시장의 규모는 크게 성장했지만, 실제 다수의 대중은 극심한 문화적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문화산업과 시장의 구조가 철저하게 소수의 메이저 리그만 존재하는 불균형 구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문화적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없고, 문화적 삶의 질이 형편없는 가운데 창조성의 수준이 높아지길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창조성의 제고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문화적 다양성의 확보이며 이는 풍부한 마이너 리그의 육성을 통해 가능하다.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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