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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1> 미시시피州 잭슨市-흑인민권운동의 성소(聖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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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1> 미시시피州 잭슨市-흑인민권운동의 성소(聖所)

입력
2008.01.1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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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주의 주도(州都) 잭슨은 시민 열 사람 가운데 여섯이 흑인이다. 그것의 논리적 귀결이랄 수는 없겠으나, 주립 잭슨대학교도 흑인 대학교다. 로이 디베리 부총장을 만나러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정에서 백인이나 아시아계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디베리 부총장은 내게 “코카서스인이나 아시아인의 입학이 금지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잭슨대학교는 원칙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대학”이라고 말했다.

(디베리 부총장만이 아니라 내가 잭슨에서 ‘공식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흑인’이라는 말 대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썼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기는 할 테다.

그러나 나는 관례에 따라 ‘흑인’이라는 말을 쓰겠다. 디베리 부총장은 백인을 ‘코카서스인(Caucasian)’이라 불렀다. 사실 백인을 ‘유럽계 미국인’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은 ‘충분히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이라는 뜻을 함축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잭슨의 첫 흑인 시장이 탄생한 것은 1997년이었다. 그가 하비 존슨이다. 2001년 12월 잭슨시 사우스 프레지던트 거리 219번지 시청사에서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두 번째 임기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나는 미시시피에서 세 사람의 시장 또는 시장당선자를 만났다. 하비 존슨말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인디애놀라(흑인 기타리스트 B. B. 킹의 고향이다)의 아서 마블 시장당선자와 출라의 이본 브라운 시장이다. (영어로는 세 사람 다 mayor지만, 인디애놀라나 출라는 워낙 규모가 작은 도시여서 군수나 읍장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으로 통일하겠다.)

아서 마블 역시 인디애놀라의 첫 흑인 시장당선자였다. 미시시피는 흑인 인구가 40%에 가깝다. 1930년대까지는 흑인이 백인보다 많았고, 지금도 미국에서 흑인 비율이 가장 놓은 주다. 그런데도 미시시피에는 ‘첫’ 흑인 공직자들이 많았다. 흑인들의 투표권 행사가 그만큼 짧은 역사를 지녔다는 뜻일 테다.

미시시피에서 내가 만난 세 사람의 시장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이는 출라의 이본 브라운 시장이었다. 아니, 인상적이었던 것은 브라운 시장이 아니라 출라라는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거기서 ‘풍요로운 미국’의 이미지를 접었다.

‘출라’는 그곳에 살던 원주민 말로 ‘붉은 여우’라는 뜻이라 한다. 수백 년 전엔 거기서 붉은 여우들이 뛰놀았으리라. 그러나 내가 본 출라는 여우도 굶어죽을 만큼 궁핍이 타운 전체를 덮고 있었다.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부자 나라라는 미국이란 말인가? 아니 출라 주민의 4% 정도라는 백인들의 거주 지역만은 꽤 그럴싸했다.

그러나 나머지 구역에서는, 브라운 시장이 살고 있는 교회(남편 로버트 브라운씨가 그 교회 목사였다)가 그나마 반반한 정도였다. 우체국을 겸하고 있는 시청 건물도 초라했다. 많은 흑인들이 트레일러를 빌려 살고 있었고, 그것마저 없는 노숙자들도 보였다. 때는 겨울이었다!

출라의 가난은 단순히 내 인상이 아니었다. 브라운 시장은 출라가 미국에서 네 번째로, 미시시피주에서 세 번째로 가난한 도시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출라가 문맹률에서도, 청소년 범죄율에서도 미국 최고라고 덧붙였다.

출라에는 흑인 시장이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본 브라운은 첫 흑인 ‘여성’ 시장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공화당원이었다. 그녀가 공화당에 가입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남편 브라운 목사는 아내를 말렸다고 한다. 공화당에 투표하는 흑인은 커널 샌더스(KFC 창업자)에게 투표하는 병아리나 다름없다는 객담이 있을 정도로, 흑인 사회가 공화당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본 브라운 여사는 출라의 가난을 없애려면 ‘여당’ 시장이 되는 것이 유리하다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브라운 시장이 부시에게 거는 기대는 1970년대 한국 새마을 지도자가 박정희에게 거는 기대를 연상시켰다.

나는 부시도 박정희도 새마을운동도 싫었지만, 그녀의 의지를 마음속으로도 조롱할 수 없었다. 출라의 가난을, 그 날것의 가난을 목격한 터였기 때문이다. 조롱이라니. 그녀는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잭슨으로 돌아가자. 미시시피에서의 내 첫 방문지는 잭슨 교외 클린턴의 마운트 후드 침례교회였다.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때말고는 교회에 가보질 않았던 터라, 수십 년 만에 개신교 예배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남부 침례교파에 속해있다는 마운트 후드 교회의 예배 풍경은 내가 어린 시절 서울에서 보았던 예배 풍경보다는 덜 소란스러웠다.

프레드릭 윌리엄스 목사와 교인들은 내게 남부식 환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함께 갖는 식사 자리에 초대됐는데, 맛깔난 음식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친절함과 쾌활함에 반했다.

교회 방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튿날에도 클린턴의 홀리 고스트 침례교회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남부식 환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권운동의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이 교회의 지미 버스 목사는 NAACP(전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클린턴 지부의 성직자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NAACP는 1909년에 설립된 흑인민권운동 단체다. 이 단체의 역사는 그대로 미국민권운동의 역사와 포개진다. 나는 홀리 고스트 교회에서 버스 목사만이 아니라 NAACP 활동가들을 여럿 만났고, 활자로만 접했던 이 단체의 ‘무용담’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미시시피는 ‘깊은 남부(딥 사우스)’라 불리는 지역의 하나다. 딥 사우스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인종차별이 심했다. 미시시피주 록시에서 태어나 잭슨에서 성장기를 보낸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는 자전 소설 <흑인소년> 에서 그 가혹한 차별의 경험을 되돌아본 바 있다.

차별이 심했던 만큼, 차별철폐운동도 딥 사우스에서 가장 거셌다. 잭슨은 그 차별철폐운동의 중심지였다. 미시시피대학교 의료센터의 에드 킹 교수가 들려주는 그 운동의 역사는, 그 자신 오랜 세월 흑인민권운동의 활동가로 일했던 만큼, 실감날 수밖에 없었다.

에드 킹 교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메드거 에버스(NAACP 미시시피 지부장을 지냈다) 같은 민권운동의 거물들과 함께 일했다. 성이 킹이지만, 마틴 루터 킹의 친척은 아니다. 사실, 그는 백인이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이(사실은 미국의 흑인들이) 차별에 시달린 것은 리처드 라이트가 잭슨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1910년대, 20년대만은 아니다. 차별은 때로 법률적 제도적 뒷받침을 받아, 때로 사적인 폭력과 배제를 통해, 집요하게 이뤄졌다.

미국 민권운동의 시동이 걸리던 1961년 5월24일, 남부의 인종분리에 항의해 흑백이 섞여 버스를 타고 남부 종단 여행을 감행한 다수의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ders)’가 ‘평화를 해쳤다’는 이유로 잭슨에서 체포됐을 때, 잭슨은 민권운동의 상징적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수없이 살해위협을 받던 메드거 에버스가 1963년 6월12일 잭슨 자택에서 KKK 단원 바이런 들라 벡위스에게 마침내 살해됐을 때, 이 도시는 흑인민권운동의 성소(聖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법정이 벡위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1994년에 이르러서였다.

잭슨은 또 1966년 제임스 메레디스가 조직한 ‘두려움에 저항하는 행진’(‘메레디스 행진’이라고도 부른다)의 종착지이기도 했다. 메레디스는 완고하게 흑백분리주의를 고집했던 미시시피대학에 처음으로 입학이 허락된 흑인이었다.

그는 흑인민권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흑인들의 선거인 명부등록을 격려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잭슨까지 행진을 조직했다. 메레디스는 행진이 시작된 이튿날인 6월6일 오브리 제임스 노벨이라는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저격당했지만 살아남았고, 6월26일 15,000 명의 잭슨 시민 앞에서 인종 사이의 평등을 외침으로써 행진을 마무리했다.

잭슨은 18세기 말 프랑스인 루이 르플뢰르가 개척했다. 그래서 초기엔 르플뢰르스블러프(LeFleur's Bluff)라 불리기도 했다. 잭슨이라는 이름은 1812년 전쟁(미-영전쟁)에서 공을 세운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앤드류 잭슨은 군인으로 복무하던 1815년 1월8일, 미-영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대파함으로써 남부지역을 확고히 지켜냈다.

인명을 딴 도시 이름이 외국엔 드물지 않다. 거의 다 정치인 이름이다. 그러나 한국엔 아직 그런 도시가 없다. 행정중심 복합도시의 이름이 세종으로 정해지긴 했지만, 적어도 현대인물의 이름을 딴 도시 이름은 생겨나기 어려울 것 같다. 정파의 이해를 가로질러 두루 존경받는 정치인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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