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태안의 비극'은 '태안의 기적'을 낳았다. 언론은 유출된 기름 제거를 위해 태안에 밀려든 자원봉사자의 물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한국이 곧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쳤다.
한국은 참으로 묘한 나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ㆍ고생들의 강요된 엉터리 자원봉사를 비판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개탄하는 기사가 흘러 넘쳤는데, 이렇게 빨리 달라질 수 있는 건가?
■ 태안 자원봉사로 송년동창회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건 없다. 한국인은 스스로 내켜야 하는 사람들이다. 법이나 규칙의 제정보다는 분위기 조성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태안의 기적'엔 수많은 감동 스토리가 줄을 이었지만, 내가 가장 주목한 건 어느 동창회가 연말 모임을 태안에서의 자원봉사로 대체했다는 걸 알린 기사였다.
동창회, 동문회, 또는 교우회로도 불리는 학연 문화는 한국의 모든 연고 문화 가운데 참여율과 영향력이 으뜸이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회적 관계망 가입비율은 동창회가 50.4%로 가장 높고, 종교단체 24.7%, 종친회 22.0%, 향우회 16.8%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공익성이 짙은 단체들의 가입률은 2%대에 머물렀다.
언론은 이들 중 시민단체의 활동에 가장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지만, 한국사회의 실세는 동창회지 시민단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동창회는 '음지의 문화'로 취급 받는다. 아니 '이중성의 문화'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사적으론 동창회를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은 신경을 쓰지만, 공적으론 감추려 든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주범들이 대부분 학연으로 똘똘 뭉쳐 있다. 어느 조직에서건 인사 문제로 잡음이 일어나는 걸 보면 대부분 '학연 마피아'의 독식과 관련이 있다. 대학의 총ㆍ학장 선거에서부터 학회 회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비정치적인 엘리트 집단의 선거에서도 가장 큰 힘을 쓰는 변수는 바로 학연이다.
한국의 대학입시 경쟁이 '전쟁'으로 불려도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좋은 학연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믿음은 한국인의 신앙이 되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학연을 음지의 문화로만 다루려고 한다. 학연주의에 대한 포괄적 비판은 흘러 넘치지만, 이런 비판으로 학연 문화가 달라질 수 없다는 건 이제 분명해졌다. 학연주의 비판에 앞장섰던 사람으로서 갖게 된 확신이다.
나는 그런 확신에 근거해 '실천 가능한 방안'으로 동창회 활동에 공익적 성격을 가미하자고 주장해 왔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회비의 1%라도 떼내어 공익적 목적을 위해 쓰자는 것이다.
이 타협책은 학연주의에 비분강개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이 비분강개 이외에 어떤 현실적 대안을 내놓고 실천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느 동창회가 연말 모임을 태안에서의 자원봉사로 대체했다는 건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 큰 '사건'이다. 보통 성인 1인 당 여러 개의 동창회 모임에 참여하므로 매년 한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동창회 모임은 수억 건에 이른다. 동창회 문화에 1% 변화만 일어나도 그 총합 효과는 엄청나다.
■ 그런 공익적 활동을 장려하자
신문 단신 기사로 나오는 동창회 관련 보도부터 당장 뜯어 고치자. 동창회의 공익적 활동을 꼭 밝힘으로써 공익적 활동이 없는 동창회를 쑥스럽게 만들자. 명문 경쟁을 졸업생들의 공익적 활동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자.
동창회 문화가 1%라도 바뀌면 한국사회에 엄청난 긍정적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걸 믿어보자.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로 구설수에 오른 고려대 교우회부터 조만간 멋진 공익적 활동으로 명예를 드높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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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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