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에 서설이, 그것도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에 먼저 머리 속을 스친 것은 화순의 운주사와 진안의 마이산(673m)이었다. 운주사의 와불이 하얀 눈옷을 입고 있으려나, 눈 덮인 마이산은 또 어떤 분위기일까.
눈이 그치고 얼마 후 운주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뿔싸, 석불 위의 눈은 이미 녹은 지 오래란다. 남녘의 따뜻한 기운이 마이산의 눈마저 다 녹여버리기 전에 서둘러 가속기를 밟아 진안으로 향했다.
마이산 도립공원 입구에서 보니 마이산의 두 봉우리에는 다행히도 아직 눈이 덮여 있었다. 주변의 다른 눈 내린 산들, 육산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얀 속살에 잔가시들이 박혀있는 고슴도치처럼, 산들은 이제야 제 능선과 제 골짜기를 훤히 내보인다.
마이산은 생김새부터 묘한 미스터리 산이다. 봉우리가 암수로 나뉘어 있는 것도 독특하지만 동서남북에서 본 모습이 모두 다르다.
산자락에는 언제 누가 세웠는지조차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돌탑들이 서있고, 한겨울 산 골짜기에 물을 떠놓으면 고드름이 거꾸로 치솟는다. 이런 신비함 때문에 마이산은 오래전부터 영산(靈山)으로 여겨져왔다.
북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발 두발 눈길을 걸었다. 오르막 계단을 한참 오르니 수마이봉과 암마이봉을 잇는 작은 능선의 고갯마루, 천왕문이다.
여기서 수마이봉으로 150m 오르면 화엄굴. 눈계단이 미끄럽다. 화엄굴에는 사시사철 석간수가 흐른다. 이 샘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많은 부인네들이 몰려들던 곳이다. 지금은 비둘기 때문에 오염돼 마실 수 없는 물이 됐다.
화엄굴에서 바라본 암마이봉. 녹은 눈이 고드름으로 얼어붙은 봉우리엔 군데군데 커다란 흉터 같은 구멍이 뚫렸다. 마치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파먹은 듯 홈이 패였다. 마이산의 바위는 만지면 쉽게 부스러지는 자갈 섞인 돌, 역암(礫岩)으로 이뤄져 있다. 봉우리는 약 9,000만년에서 1억년 전 호수가 융기해 생겼다.
쉽게 바스라지는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타포니(Tafoni) 지형이다. 타포니란 말은 벌집 모양의 자연동굴을 뜻하는 코르시카의 방언에서 유래했다.
고개를 넘어 조금만 내려가면 은수사다. 절마당에서 바라본 마이봉엔 눈이 없다. 볕을 받는 남쪽 면이라 일찍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은수사 청실배나무 아래 정화수 그릇에 물을 떠 놓으면 가운데서 얼음기둥이 하늘로 솟아 오르는 역고드름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거꾸리 고드름’을 ‘심령의 발로(發露)’라 일컫기도 하지만, 우뚝 솟은 암수 마이봉 사이에서 급격한 대류현상으로 공기가 위로 빨려 올라가는 효과 때문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은수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사찰 마당에 있는 천연기념물 줄사철나무(380호)와 청실배나무(제386호). 청실배나무는 조선 태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니 600여년이 넘었다.
정겨운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돌탑이 떼를 이루고 있는 탑사다. 기기묘묘한 탑 80여기가 서 있다. 탑들은 푸석푸석한 이곳의 지형에서 어떻게 모았는지 죄다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다. 돌들을 마구 쌓아올린 것 같지만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탑사 대웅전 옆으로 암봉에서 눈 녹은 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수직의 절벽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나무에 맺혀 빙화로 다시 피어났다.
탑사를 지나 내려오면 커다란 저수지 탑영제다. 호수는 마이산 덩어리를 통째로 담근 채 하얗게 얼어붙었다.
마이산 가는 길은 북쪽 매표소나 남쪽 매표소를 이용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북쪽은 마이산의 두 봉우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대신 약간의 산행을 감수해야 한다. 남쪽은 걷는 길이 길지만 거의 평지라 쉽게 탑사와 은수사까지 이를 수 있다.
진안=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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