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작가 박미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룹전을 기획하고 있던 어느 큐레이터였다. 그는 대뜸 “오렌지 톤의 그림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연출해놓고 보니 전시 공간 한쪽이 좀 허전한데, 오렌지 톤의 그림을 하나 넣으면 딱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작가에게 오렌지 톤의 그림이 한 점 있기는 했지만, 사이즈나 색상이나 모두 걸맞지 않아 결국 작가의 그림은 전시에 초대받지 못했다.
화가는 곧 의문에 빠졌다: “그가 말하는 ‘오렌지’는 어떤 ‘오렌지’였고, 내가 생각한 ‘오렌지’는 어떤 ‘오렌지’였을까? 실제로 시장에 존재하는 ‘오렌지’ 물감은 어떤 ‘오렌지’일까?” 이런 의문은 ‘어느 조건에나 부합하는 오렌지 톤의 만능 그림’을 만드는 일로 이어졌다.
우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오렌지 색 아크릴 물감을 모두 구매했다. 물감의 이름에 ‘오렌지’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면 모조리 사 모은 것. 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 와보니 ‘오렌지’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 물감들(버밀리언과 오리엔트 옐로)도 섞여있었다. 흥미로운 실수였다. 하지만 그 물감들은 구매 색상표에 기록된 뒤 바로 기각됐다. (품질에 문제가 있는 국내 제조사의 물감도 함께 제외됐다.)
작가는 자신이 사 모은 물감으로 3㎝ 두께의 색띠 서른 줄로 구성된 ‘오렌지 페인팅’(2002)을 제작했다. (색상의 배치는 제품명의 알파벳순을 따랐다.) 사이즈는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것이지만, 일단 시제품(?)은 강남의 중ㆍ상류층을 위한 고급 아파트의 거실 높이와 일반적인 소파의 너비에 어울리는 크기로 제작했다.
특정 큐레이터를 비난하거나, 강남의 그림구매 패턴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오렌지 톤의 그림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통용될 수 있는 추상화’를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덤덤히 몇몇 사회적 서사들을 엮어 한 점의 포스트-미디엄 회화를 제작했을 뿐이었다. 고로 우리는 이 기이한 그림을 ‘연루된 사실들을 기록하는 미적 데이터베이스’라고 봐야 옳겠다.
이후 작업 논리는 한층 더 심화됐다. 상하이에서 제작한 벽화 ‘창화길 826번지에서 모가샨길 50번지까지’(2003)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상하이의 거리(호텔에서 전시장까지)를 거닐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 가운데에서 공공성을 지닌 사물(건물 외벽, 공중 전화, 노상 가구, 간판, 가스 파이프 등)의 색상을 팬톤컬러차트를 이용해 수집했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한 색상은 중국제 수성 페인트로 재현됐다.
벽화 ‘창화길 826번지...’는 천장이 높은 상하이 옛 조차지역의 고급 주택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다. ‘오렌지 페인팅’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지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소파의 높이와 너비에 맞췄다. 26줄의 색띠로 구성된 벽화는, 사람들이 예상했던 중국의 색상과는 다른, 어정쩡한 파스텔 톤의 색상 컬렉션을 보여준다. 따라서 나는 이를 ‘상하이의 과도기적 시티스케이프를 포착하는 색띠의 리얼리즘 DB’라 부른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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