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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내 탓'하는 책임정부를

입력
2008.01.02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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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신이 났다. 최근 냉면 집이나 설렁탕 집에 그들이 부쩍 늘었다. 두세, 혹은 서너 명이 조용히, 소곤소곤 그릇만 비우던 것이 예전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숫자도 많거니와 대화도 늘어나 들뜨고 부산하다. 음식점 뿐 아니라, 노인정이나 경로당은 물론 가족모임에서도 그렇다. 그들 목소리의 데시벨(db)이 부쩍 높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햐~, 그것들 이번에 혼 좀 났을 게다.”

■ ‘대선 응징’에 즐거워하는 국민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 정부 출발을 앞두고 ‘신이 난’ 쪽이 ‘기가 죽은’ 쪽보다 많은 것은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의 당연한 결과다. 5년마다 되풀이되는, 기대감으로 설레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번에 신이 난 이유가 어떤 부류를 혼내줬다는 상쾌함이 크다는 점은 기대보다 응징의 엔도르핀이 더 많다는 의미다. 새 사회 주도층이 종전보다 10여세 높아질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꼭 어르신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응징을 해야겠다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은 상대의 ‘네 탓 타령’인 듯하다. 배고픈 상황은 견디지만 기분 나쁜 짓거리는 보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이웃이다. ‘위장’이나 ‘BBK’ 문제가 그들의 기대를 깎아먹은 것은 분명하지만, ‘혼 내줄 사람들을 응징하는 즐거움’을 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네 탓 타령’은 한마디로 책임지려 들지 않는 행태다. 임기가 끝나가는 지금까지 다수 국민들 마음에 ‘미운 털’로 박혀 있다. ‘참시(斬屍)’ 의도는 없지만, 적지 않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응징의 대상이 된 원인은 그러한 ‘무책임’이 크다. 이들은 ‘국민들이 왜 우리의 진정을 몰라줄까’라고 여긴다지만 바로 그것이 ‘네 탓 타령’의 전형이다.

충남 태안반도의 원유유출 사고에 전국에서 60만, 7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몰려 옷가지와 헝겊으로 바위와 자갈을 닦았다. 그 얼굴엔 ‘유조선 벽에 구멍이 난 것마저 내 탓이다’는 표정이 있었다.

IMF사태마저 자신의 탓이라고 여겨 금붙이와 귀금속을 내놓았던 이웃들의 모습이다. 원유 유출이나 IMF사태를 ‘내 탓’이라고 생각하려는 국민을 향해 자신들의 잘못마저 ‘국민 탓’이라 했으니 응징이 없을 수 없었다.

현 정권의 숱한 ‘네 탓 타령’을 새삼 열거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남의 탓으로 여겨 이유를 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탓’인 줄 알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그러는 행태를 국민은 진정 얄밉게 보았다.

입으로는 ‘네 탓’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내 탓’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위선이다. 배에서 온갖 목조물을 갉아먹은 쥐들이 배가 수명을 다했을 땐 자격지심(?)으로 배가 침몰할 것을 먼저 알고 바다로 도망치는 행태를 생각나게 한다.

■ 목숨으로 양심 지키는 공직풍토

그러한 무책임을 이제부터 없애야 한다. 몰라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 양보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위선으로 포장한 책임 회피는 용납할 수 없다.

위선이 정상적 모습으로 보이려면 선의의 국민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시책과 사안에 책임지는 자는 한 명도 없고, 오히려 ‘국민들이 모르는 선각적인 정책’을 했다고 자찬했다.

부동산 정책 고안자에게 훈장을 주고, 고교ㆍ대학 입시를 책임진 부서에 대통령 표창을 내리는 식이다. 그러한 꼴이 보기 싫어 다수 국민이 응징의 칼을 갈았고, ‘반(反)노무현’ 쪽으로 표를 몰았다.

정초에 좀 뭐한 얘기지만 덧붙이고 싶다. 1974년 1월 대구에서 고교입시 부정사건이 있었을 때 직접 관련도 없는 해당 교육감이 즉각 사퇴하고 며칠 뒤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서 “책임 있는 교육자의 양심으로 생명 부지가 부끄럽다”고 했다. 극단적 행동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이후 그의 10분의 1, 100분의 1만큼 ‘내 탓의 책임’을 갖는 공직자를 본 적이 없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신이 나 있는 국민들은 무엇보다 ‘책임정부’를 바라고 있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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