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권투위원회로부터 2년간 징계처분을 받고 사실상 링을 떠났던 나는 1980년 12월19일 염동균과의 이벤트성 대결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글러브를 벗었다.
그리고 후배들을 지도하는 트레이너로 변신했다. 김철호, 장정구 등이 내 지도를 받았다. 김철호는 전호연씨 프로모터 소속이었지만 1차 방어 때부터 내 지도를 받게 된다. 1981년 1월24일 라파엘 오르노를 9회 KO로 누르고 챔피언에 오른 김철호는 1차 방어전 상대가 일본의 ‘복싱 영웅’ 지로 와다나베로 정해졌다.
그러자 부담을 느낀 전호연 프로모터는 나에게 김철호를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김철호 3차 방어전까지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82년 4차 방어전에 들어가기 직전, 프로모터와 사이가 벌어지면서 김철호의 트레이너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김철호는 5차 방어전을 비긴 뒤 6차 방어전에서 자신이 챔피언 벨트를 따냈던 오르노에게 패해 타이틀을 상실했다.
15차 방어까지 해낸 장정구의 발굴도 나에게 있어서는 잊지 못할 일이다. 장정구가 무명인 시절, 호된 훈련에 질려서 짐을 챙겨 부산으로 내려 가버린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장정구의 자질을 알아보고 “저 놈이 작아도 크게 될 놈이니까 데리고 오자”라고 전호연 프로모터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싸가지 없는 놈은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자질을 너무 아깝게 여긴 나는 부산으로 내려가 그를 데리고 와서 다시 글러브를 끼게 했다. 그리고 82년 9월18일 그가 힐라리오 사파타와 첫 번째 경기에서 세계챔피언에 오르기 직전까지 그를 지도했다.
82년을 끝으로 영광과 좌절이 교차했던 한국을 떠나 미국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의 파란만장한 2라운드 삶이 다시 시작된다. 당시 재결합했던 전처(이진희)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딸 주희까지 모두 다섯 식구와 함께 였다. 한 지인이 미국 영주권을 얻어 줄 테니 알래스카로 짐을 싸 들고 오라는 말에 ‘제2의 삶’을 꿈꾸며 낯선 알래스카행을 택했다.
처음 시작한 일이 택시 운전이다. 영어를 배울 수 있는데다 수당도 나쁘지 않아 괜찮았다. 그러나 택시 기사 일을 한지 6개월이 되지 않아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 알래스카에서 마약밀매 혐의로 체포’라는 제목이 미국 지역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당시 실제 한 달 가량을 이국땅의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연인즉 이렇다. 평소 택시 단골손님 한 명이 있었는데 어느날 밤 ‘콜’을 받고 갔더니 그는 누군가에게 전달해 줄 서류가 있다며 많은 팁을 제시하고 나에게 서류를 부탁했다. 그 순간 사방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잠복해 있던 경찰차들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십 수명의 경찰들이 나의 택시를 에워쌌다. 양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촌놈이 이용 당한 것이다. 마약거래 상습범이었던 그 손님은 이미 체포된 자신의 부인을 빼내기 위해 또 한 명의 마약범을 만들어야 했고, 그 덫에 내가 걸려든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 한달 동안의 ‘철창신세’로 끝났지만 앞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나의 출감을 위해 보증을 서준 사람이 한국식당을 운영하는 동포였는데 신원 보증을 서 준 대가로 나는 그 식당의 주방에서 한동안 접시를 닦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식당 주인은 전 세계챔피언을 주방 설거지꾼으로 고용하는 ‘챔피언급 메뉴’를 갖게 된 것이다. 단골 손님이 오면 식당 주인은 “어이, 홍수환씨! 잠깐 나와봐요”라며 부른 뒤 그들에게 인사하도록 했다. ‘이번엔 또 어떤 동포가 접시 닦고 있는 내 초라한 모습을 보며 동정의 눈길을 던지려고 하는 것일까?’ 새로운 구경꾼들을 만날 때 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매맞는 링보다 인생이 더 무섭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에게 다운이 없었다면 비록 두 체급을 석권했을지라도 카라스키야와의 타이틀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복싱을 그만두고 사회생활에서의 여려 차례 좌절이 있었고, 그 좌절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 절망이 희망을 낳았고, 희망이 더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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