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의 길고 긴 여정이 끝났다. 선거 개표 방송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가 승자독식의 사회임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었다. 어느 방송이든 몇 시간을 지켜보아도 1위와 2위 후보의 득표 상황만 비쳐줄 뿐, 3위 이하의 후보들은 그 존재감조차 느끼기 어려웠다.
문국현 후보의 득표율이 얼마나 상승하고 있는지, 이회창 후보가 얼마나 보수 진영의 표를 잠식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는 게 더 빨랐다.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라고 권유하던 방송 매체가 1, 2위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의 알 권리는 철저히 무시한 셈이다.
유세 기간 내내 방송이 보여준 후보자들에 대한 자의적인 보도 패턴 역시 의문을 갖게 했다. 방송사들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같이 첫 번째 뉴스 꼭지에서는 정동영, 이명박, 이회창 후보를 묶어 보도하고, 그 다음 꼭지에서는 권영길, 이인제, 문국현 후보 순으로 묶어 보도를 했다. 각 후보가 속한 정당의 국회의원 수를 기준으로 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지지율 순도 아닌 이 이상한 조합을 누가 생각해냈는지 모르지만, 누구나 공감할 원칙이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제는 언론의 승자 중심적이고 무원칙적인 보도 행태에 대한 비판을 넘어, 내년 2월 출범하는 차기 정부가 내놓을 미디어 정책의 방향을 가늠해 봐야 할 시점이다. 이미 이명박 후보는 국정홍보처의 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그 밖에도 방송통신 융합이라는 큰 시대적 흐름에 따라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를 합쳐 가칭 ‘정보미디어부’ 같은 부처를 신설하고,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며, 지상파 방송의 구조개편을 통한 ‘1공영 다민영’ 체제로의 전환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히 방송 부문과 관련 정부조직의 제도적 개편이라는 엄청난 변화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12월 22일자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차기 정부의 미디어 정책은 한나라당 일류국가비전위원회가 중심이 돼 윤곽을 잡아가고 있으며, 새 정부 출범 후 1년간 ‘21세기미디어위원회’(가칭)를 운영해 방송통신 융합 시대에 걸맞은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방송위원회는 11일 50여명에 달하는 언론학자들을 중심으로 ‘미래의 방송 특별연구위원회’를 만들어 내년 2월과 5월에 중장기 방송정책 연구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나섰다. ‘미래의 방송 특별연구위원회’의 안이 한나라당의 미디어 산업 관련 정책에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 두 위원회가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는 ‘방송의 독립성과 공공성’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방송통신 융합이라는 대세 속에서 방송위원회를 대체할 기구를 만드는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방송위가 기존에 확보하고 있는 제도적 차원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조직이 통합이 되고 그 명칭이 무엇이 되건 간에 정치 권력이 방송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도록 독립적인 기구로 존치시켜야 한다.
또 방송구조 개편에서도 MBC를 민영화하고 KBS, EBS, 아리랑 TV를 하나로 통폐합하는 것이 과연 방송의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인지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시장의 논리가 횡행하게 되면 문화 다양성, 지역성, 소수자 권익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신문방송 겸영 허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겸영 허용으로 인한 거대 언론권력의 출현이 다양한 여론 형성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철저한 사전 평가가 있어야 한다. 미디어 산업의 개편은 정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부당하게 개입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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