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 문학동네"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2000년 12월 24일 미당 서정주 시인이 85세로 사망했다. 21세기 첫 해 끝자락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해진 서정주의 부음, 그리고 그보다 석 달 먼저인 그 해 9월 소설가 황순원의 사망은 곧 20세기 한국 현대문학에 고해진 종언이었다.
<화사집> (1941)은 서정주의 첫 시집이다. 여기 실린 24편의 시를 통해 한국 시가 비로소 현대성을 획득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식민지 청년 서정주의 광기 어린 언어, 그 토착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는 꽃뱀의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처럼 원초적인 생명력을 토해 냈다. 화사집>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죄인)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 입에서 天痴(천치)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서정주는 이 시집의 첫 시 ‘자화상’에서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라며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고, 애비(전통)와 세상(모더니티)을 동시에 부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V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껴’ 있다며 ‘피’로 상징되는 본능의 언어, ‘가시내’로 상징되는 관능의 언어로 나아간다.
‘피’와 ‘가시내’ 혹은 ‘게집’은 아마 <화사집> 의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일 것이다. ‘복사꽃 ?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늘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 病(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봄’ 전문). 화사집>
일제 말기의 친일시, 독재정권을 미화한 시로 서정주는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에 의해 우리말이 한층 높은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가 ‘시의 정부(政府)’라거나 ‘시선(詩仙)’으로까지 불렸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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