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 밝아오는 창문으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가 잠을 깨운다. 이슬람과 기독교, 고대 로마와 집시의 문화까지, 수천년의 이질적인 문화들이 한데 녹아 있는 문화의 용광로 같은 도시, 스페인 세비야의 아침이다.
기원 711년부터 이 지역을 점령했던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세비야의 건물들은 대부분 내부에 천장이 뚫린 네모난 정원이 있고, 벽은 이슬람문화권 특유의 기하학적 무늬의 타일로 장식이 돼 있다.
세비야의 정신 세계는 또 15세기 이후 이곳을 정복한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다 플라멩코 춤에서 볼 수 있는 집시의 영혼, 이탈리카 등 고대 로마문명의 유적, 신대륙에서 건너온 황금 유물들도 세비야라는 도시 하나에 모여있다.
차 한 대 겨우 지날 만한 좁은 골목길을 걸어 카페와 바, 식당을 겸한 전형적인 스페인식 선술집에 들어선다. 빵 사이에 토마토와 하몽 조각을 끼우고 올리브 오일을 뿌려 만든 샌드위치와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이 이 도시의 일반적인 아침 메뉴다.
스페인의 대표적 전통 음식인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소금에 절인 뒤 고지대의 신선한 바람에 건조시켜 장기간(6개월~2년) 숙성해 만드는 일종의 햄이다. 살짝 느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스페인 사람들처럼 하루 내내 여러 잔의 커피를 마시기 힘들다면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주문해도 좋다. 가로수 대부분이 오렌지 나무일 정도로 오렌지가 지천인 세비야에서는 거의 모든 식당이나 카페에서 갓 짜낸 생과일 오렌지 주스를 마실 수 있다.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시청 쪽으로 걸어가는 길, 낯선 외국인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세비야 사람들을 만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일년 내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천혜의 기후 때문일까, 고대 페니키아인부터 로마, 이슬람, 중세 기독교, 아프리카와 신대륙, 집시까지 몇천년간 수많은 문화와 인종이 한데 섞여 부대끼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스페인 남부 사람들의 친절은 ‘감동적’이다. 한 노인에게 중국 식당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자 직접 그곳에 데려다 주기까지 한다.
시청을 지나 5분 정도 더 걸으면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 탑이 있다. 세비야 대성당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성당이다.
당초 8세기에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을 점령했던 무어인들이 세운 모스크가 있던 자리인데 15세기 이곳을 점령한 기독교인들이 모스크를 허물고 200여년에 걸쳐 완성했다.
엄숙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안에는 전성기의 스페인을 상징하는 황금벽과 황금으로 만든 공예품, 대가들의 그림과 무려 7,000개의 파이프가 달린 엄청난 크기의 바로크 양식 오르간 등이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유물들에는 그러나 노예처럼 착취당했던 신대륙 원주민들의 피눈물도 어려 있다.
대성당에는 회교 사원 때의 자취들도 남아 있는데, 이중 90m가 넘는 종탑인 히랄다는 세비야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지어진 히랄다 꼭대기에 기독교인들이 종루를 만든 것인데, 지금도 30분마다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탑에 오르면 대부분 나즈막한 건물들로 이뤄진 세비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세비야 대성당 바로 근처에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매우 흡사한 알카사르 궁전이 있다. 정교한 문양의 벽 타일과 말굽 모양 아치, 걷다 보면 지칠 정도로 넓으면서도 아름다운 정원 등 스페인 특유의 이슬람 양식인 무데하르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쭉쭉 뻗은 야자수 사이로 자연스럽게 손질된 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이 탄성을 자아낸다.
세비야의 점심 식사는 곧 수다와 여유의 시간이다. 우리의 볶음밥과 비슷한 스페인의 대표적 음식인 빠에야와 튀김요리, 하몽 등에 부드러운 와인을 곁들인다. 이 시간에는 거리의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는다. 직장인이 아니면 식사 후 낮잠(시에스타)을 즐기기도 한다.
세비야 관광의 가장 큰 장점은 좁은 도시 안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볼거리가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름난 건물이나 유적이 아니더라도 거리 곳곳에는 사진에 담아두고 싶은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시내 동남쪽을 감싸며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 주변에는 한때 꼭대기가 금빛 타일로 덮여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다는 황금탑과 스페인에서 가장 큰 투우 경기장인 마에스트라사 경기장이 있다.
스페인광장과 아메리카광장 등 웅장하고 길다란 건물들이 둘러싼 광장과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리아 루이사 공원을 둘러보면, 누군가 세비야를 보고 그랬듯이 ‘한 달 만이라도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밤 9시가 넘어설 무렵이면 ‘안달루시아의 혼’이라 불리는 정열의 춤 플라멩코가 세비야를 찾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세비야처럼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여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플라멩코는 노래와 기타 반주, 춤 3요소로 구성된다.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 댄서들이 펼쳐 보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플라멩코는 세비야의 밤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 여행 수첩
▲ 세비야에서 오렌지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 유명한 '세마나 산타'(성ㆍ聖 주간)와 4월 축제가 시작된다. 7월에 트리니아나에서 열리는 '산타 아나의 밤' 등 다양한 축제 주간은 여행의 성수기로, 숙소를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 세비야는 유적지가 많은 구시가지와 현대적 건물과 아파트가 있는 신시가지로 양분된다. 24시간 운행되는 버스 투어를 이용하면 짧은 시간 내에 도시 전체를 둘러볼 수 있으며, 1992년 세계 엑스포가 열렸던 장소의 다양한 현대적 건축물도 볼 수 있다. 과달키비르 강을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도시를 둘러보는 것도 멋있지만 겨울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 1월부터 2월말까지 유럽은 대대적인 세일 기간이다. 국내에서는 제법 비싸게 팔리는 스페인 브랜드(망고, 사라 등)의 옷들이 거의 반값에 팔리기 때문에 이 시기에 여행을 간다면 옷 한두 벌 사 가지고 오는 것도 좋다.
▲ 한국에서는 1주일에 3편 운항되는 마드리드 직항(대한항공)을 타고 가서, 이베리아항공 등 스페인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갈 수 있다. 일부 저가 항공편의 경우 야간 버스나 기차보다도 요금이 싸다.
세비야= 글.사진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세비야, 스페인어 어학연수에도 '딱'
스페인어의 국제어로서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세계화의 가속화, 스페인어를 주로 사용하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적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가 과소평가돼온 한국에서도 스페인어 어학연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많은 학생들이 대도시인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로 연수를 가고 있지만 사실 유럽에서는 세비야 같은 스페인 남부 도시가 인기가 많다. 중북부에 비해 기후가 훨씬 좋고 바다가 가까워 학습과 휴양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과 비교해 물가가 싸고 소매치기나 좀도둑이 없다는 점, 굳이 대중교통이나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주요 건물들이 걸어서나 자전거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어 교통비를 아낄 수 있다는 점도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어학연수생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단 음식 문제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이 없고, 짜고 국물 요리가 거의 없는 스페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스페인의 집들은 대부분 더위를 피하는 구조에 중점을 둬 중앙난방시설을 갖추지 않은 곳이 많기 때문에 12월, 1월 등 한겨울에는 집 안에서 상당한 추위를 느끼므로 전기장판과 히터 등을 구비할 필요가 있다.
세비야에서 가장 큰 어학원으로 특히 외국인 대상 스페인어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클릭(CLIC)’은 평소 200여명의 외국인들이 스페인어를 배우러 다닌다. 오전에는 4시간 동안 강의실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세비야 시내의 주요 유적지를 둘러보거나 플라멩코 관람 등 다양한 체험학습을 한다.
‘그 지역의 문화와 생활을 알아야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스페인어로 ‘엄마’ ‘아빠’도 모르는 완전 초보부터 자국 학생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어 구사 능력에 따라 여러 단계로 세분화해 수업한다.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도시 4곳에 기숙사가 마련돼 있는데, 모두 걸어서 20분 이내 거리에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 어학연수 중인 한국 학생들을 인터뷰한 결과, 기숙사는 공동 부엌을 지저분하게 쓰는 학생들이 많다면서 스페인식 아파트인 피소(piso)에 거주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보였다. 물론 피소도 학원에서 알선해 준다.
한국 학생들은 3개월에서 1년 정도 연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중에 눈부시게 하얀 지중해식 집들이 있는 남부 스페인 마을 베헤르에 위치한 자매 학원 ‘라 한다(La Janda)’에서 1개월 정도 공부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불과 6㎞만 나가면 고운 모래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펼쳐져 있는 푸른 대서양을 만난다.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말라가 해변도 지중해에 면해 있어 바닷물이 깨끗하지 않은 반면, 이곳의 바다는 정말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적은 편이어서 수영이나 서핑 등 해양레포츠도 맘놓고 즐길 수 있다.
클릭 학원, 세비야 어학연수와 관련한 문의는 EEC유럽유학센터로 하면 된다. (02)722-6388
세비야= 글.사진 최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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