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는, 심마니 산삼 찾아 헤매듯, 등반하기 좋은 빙벽을 찾아 전국의 산을 뒤지며 한겨울을 보냈다. 어느 해인가는 군 작전지역의 탱크사격장 부근에 은밀히 숨은 빙벽을 찾아갔다 포탄세례를 받고 혼비백산한 일도 있다. 아마도 재테크에 목숨 걸고 그런 열정을 기울였다면 내 노후가 더 윤택해 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빙벽을 찾으러 산골짜기를 헤집고 다니기보다는 찻길 가까운 벼랑에 인공으로 빙벽을 만든다. 개울가 응달진 북향의 바위절벽을 골라 꼭대기에 파이프를 가설하고 발전기로 끌어올린 물을 흘려 인공빙벽을 만드는 것이다. 야외에 조성된 인공빙벽으로는 가평의 용추골빙벽, 원주의 판대빙벽. 영동의 송천빙벽. 청송의 얼음골빙벽. 의령의 신반빙벽. 용대리의 매바위빙벽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매바위빙벽은 설악산 들머리 차도 옆에 위치해 겨울철 관광상품으로 다시 없는 눈요기 감이 되고 있다.
인공빙벽이 여러 곳에 조성되고 보니 빙벽등반 인구의 저변이 확산되고 매년 실시하는 빙벽대회를 통해 산악인의 기량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지금 한국 산악인의 빙벽등반 기량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2002년 오스트리아 피츠탈에서 열린 세계빙벽등반선수권대회에서 고미영이 세계랭킹 4위에 입상했고, 2003년에 있었던 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 종합랭킹에서도 고미영이 힘센 서양인을 제치고 세계랭킹 5위권에 진입했다.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찾아온 겨울철의 짧은 빙벽기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철이 지난 후에도 빙벽등반에 대한 미련이 커질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도심 한 복판에서도 사계절 모두 빙벽등반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만년설빙이 없는 한국에서 여름철에도 하얀 빙벽이 그리운 산악인들에게 서울 우이동의 O2월드 실내빙벽은 하나의 축복이다.
이 빙장이 생긴 후 산악인들은 만세삼창을 불렀다. 내친김에 폭포가 얼기 전에 O2월드에 가서 긴 여름동안 녹슨 기량을 다듬어보자. 이 벽을 반복해 열 다섯번 오르면 한국 최대 빙벽 토왕성빙벽(300m)를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
국내 기술로만 만들어진 이 빙벽은 2005년 기네스사로부터 세계 최고의 높이의 실내빙벽으로 인증됐다. 실내인공빙벽은 전세계에 10개 정도 있는데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스코틀랜드 아이스 팩토는 높이가 겨우 10m다. 따라서 O2월드의 20m 높이 수직 벽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 빙벽은 O2월드 대표인 배창순 회장의 투자와 산에 대한 열정 및 집념이 이룬 야심작이다. 지난달 내한했던 영국의 세계적 등반가 크리스보닝턴 경조차 이 빙벽의 규모를 보고 기가 질려 혀를 차고 돌아갔다.
지금은 매 주말 출근(?) 하는 열성파의 열기가 빙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구신회(72년 마나슬루 2차원정 대원) 조대행(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원ㆍ성빈센트병원 의사) 이완석(에코클럽 전 회장) 서석환(고령산악회) 유동진(한등회) 등 50, 60대 노병들로 올 겨울 토왕성빙벽에 오르기로 도원결의한 사람들이다. 이들뿐 아니라 전왕건(어쎈트산악회장ㆍ평촌고교 교감) 권경자(어쎈트 산악회) 남순철(77년 토왕성빙벽 초등 멤버ㆍ크로니산악회 전 회장) 등도 이 빙장의 단골 지킴이다.
필자도 미국으로 이주한 김영대(전 미군 2사단 도서관 사서)와 함께 지난 여름 내내 이곳에 출근했다. 그 극성 탓에 나는 오른쪽 어깨 인대가 늘어나 고생했다. 유독 빙벽등반을 즐겼고 한때 빙벽에서 추락해 지옥행 열차에 무임승차했던 김영대는 지금 미국에서 한국일보의 내 연재물을 읽으며 빙벽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있다.
그는 84년 감악산 은계폭포에서 처음 만난 뒤 20년 동안 빙벽등반에 동행한 자일 파트너다. 외통수의 올곧은 성품을 지닌 그는 가끔 술좌석에서 좌충우돌하며 나를 곤혹스럽게 했지만 우리는 다투면서 정이 깊어 갔다.
기본기를 익힌 후 자신감이 붙은 초보자가 빙벽을 오를 때 얻는 어려움은 오히려 쾌감으로 작용한다. 스스로 몸을 컨트롤하기 시작할 때 소위 자기통제의 흥분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이 익스트림(extreme) 스포츠에 미치는 것은 다른 스포츠보다 이런 자기통제의 경험이 많고 강도도 높기 때문이다. 빙벽등반에서 흥분과 즐거움을 극대화하려면 초반에 위험이 없는 인공빙벽에서 피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O2월드는 한국 산악인의 빙벽등반기술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이 빙장은 한국빙벽등반 성장의 미래가 약속된 기량 향상의 무대다. 산악인이 외면하면 돈이 안 되고 돈이 안 되면 운영난으로 폐쇄될 것이다. 그래서 이 빙장을 지키는 것은 산악인 모두의 몫이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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