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응징론 속에 철저하게 무너졌다.
“경제에 실패한 정권, 북한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퍼주기만 하는 정권, 비리 정권”이라는 한나라당의 공격은 단지 야당의 주장에 머물지 않고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20%를 조금 넘는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이 같은 현실을 잘 말해 준다.
정 후보가 떠나버린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백약(百藥)이 무효였다. 먼저 그는 신당 경선이 끝난 10월부터 참여정부와의 단절이냐, 계승이냐를 놓고 고민했다.
참여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 후보에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가 단절을 선언한다고 해서 ‘참여정부 황태자’라는 국민적 인식을 바꿀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민심이 떠난 참여정부를 두둔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공과를 모두 안고 가겠다”며 사안별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에 대한 신뢰감을 더욱 추락시켰다.
범여권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결정적이었다. 정 후보는 경선 직후 지지율이 워낙 낮다 보니 일단 독자 지지세 확보에 주력했다. 그러나 지지율이 끝내 오르지 않으면서 다른 범여권 후보들이 단일화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BBK 공방에 올인한 것도 실수였다. 자신만의 정책이 없는 네거티브로는 지지율을 올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투표일을 3일 앞두고 ‘이명박 동영상’이라는 돌발호재가 터지자 정 후보 캠프는 역전까지 장담했지만 오히려 격차는 더 벌어졌다. 이명박 후보가 특검법을 수용하면서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컸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보수 진영의 ‘스페어후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선거 막판 ‘진정한 보수’ 대 ‘사이비 보수’라는 구도를 내세우며 이명박 후보와 각을 세웠으나 1년 넘게 계속돼 온 ‘이명박 대세론’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가장 뼈아픈 패인은 출마에 명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정계은퇴 번복이나 사실상의 경선 불복이란 여론의 비판을 피해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안한 후보론’을 내세우긴 했지만 BBK 검찰 수사발표로 이마저도 설자리를 잃게 됐다.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과 자질을 공격하는 것 외엔 스스로 표를 끌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회창 후보가 선거 막판에 박근혜 전 대표와 손잡기 위해 세 차례나 집 앞에 찾아갔다 외면당한 것도 누군가 손을 내밀기 전엔 대선 승리가 어려운 처지임을 고스란히 드러낸 대목이었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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