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쿠세비츠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더블베이스 연주자 성민제(17ㆍ한국예술종합학교 3년)군은 대회 전 아찔한 경험을 했다. 짐으로 부친 더블베이스가 도착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 하루를 기다린 것. 시간이 더 지체됐다면 콩쿠르 우승은커녕, 참가조차 못할 뻔 했다.
값이 비싸고 환경에 예민한 현악기들은 보통 비행기 좌석을 차지하지만, 더블베이스는 화물칸 신세다.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성군의 악기는 높이 185㎝에 무게도 10㎏이나 나간다. 휴대가 어려워 평소 활만 갖고 다니고, 악기는 학교 것을 사용한다. 성군은 "무겁기만 하고 인기도 없는 더블베이스가 처음에는 싫었다"고 했다. 하지만 더블베이스를 쥐어준 아버지의 열의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시향의 더블베이스 주자인 성영석(46)씨.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악기점에 갔는데 미니 사이즈의 더블베이스를 가리키시며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얼떨결에 시작한 거죠."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사실 얘한테도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그 악기는 1년 전에 미리 주문해놓은 거였어요. 결혼 전부터 아이에게 더블베이스를 시키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성씨는 젊은 시절 '비인기 종목'인 더블베이스를 전공하면서 설움이 많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악기 이름을 몰라 자존심이 상한 적도 있었고, '왕기타'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더블베이스를 신앙처럼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현실 때문에 못 이룬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뤄줬으면 했어요."
7년 전, 백과사전과 방석 위에 올라선 채 힘겹게 더블베이스를 잡았던 성군은 짧은 시간에 음악계의 주목을 받는 기대주로 성장했다. 지난해 열린 독일 슈페르거 콩쿠르에서도 최연소 1등을 했고, 이번 콩쿠르에서는 심사위원들의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연습량과 부모의 정성까지 더해졌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아버지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최인자(45)씨가 반주자로 아들을 뒷받침하고 있고, 오빠의 권유로 여동생 미경(14)양도 더블베이스를 하는 음악 가족이다.
성군의 화려한 연주를 본 사람들은 더블베이스의 사이즈를 실감하지 못한다. 한 음악인은 "그 큰 악기를 너무나 쉽게 다뤄 첼로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라고 말했다. 특히 왼손 테크닉은 "기계 같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최고 수준이다.
선화예중 졸업 후 영재로 곧장 대학에 입학한 성군은 내년이면 졸업반이다. 사실 그는 이미 2년 전 줄리어드 음대에 합격했지만 부모의 뜻에 따라 한국에 남았다. 어린 나이에 혼자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정서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성군도 "아직 어리니까 유학은 나중에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에 가서 더 공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흔히 10세 이전부터 시작하는 다른 현악기와 달리 더블베이스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시작하는 게 보통. 체계적인 교육 과정도 마련돼있지 않다. 하지만 성군의 성공 사례 이후 더블베이스에도 조기 교육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다. 성군은 "비인기 종목이라고들 하지만, 그만큼 개척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통해 더블베이스를 더 많이 알고, 연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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