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벤디너 지음ㆍ남경태 옮김 / 예담 발행ㆍ324쪽ㆍ1만8,000원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손님들을 바라보는 금발의 아름다운 여종업원 뒤로 유리에 비친 흥성스러운 밤의 카페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카운터 위에 준비된 맥주들. 갈색 병에 붉은 삼각형 상표가 붙은 영국산 에일 맥주 ‘바스(Bass)’는 도드라지는 반면, 맥주의 나라 독일산은 단 한 병도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독일을 얼마나 혐오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마네의 회화적 불매운동이기 때문이다.
위스콘신 밀워키 대학의 예술사 교수가 쓴 이 책은 초기 르네상스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까지 서구 회화에 나타난 음식 그림을 통해 서양생활사를 재구성하려는 야심찬 시도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 욕망체계의 가장 공고한 하부구조로, 인류의 삶은 음식과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그러므로 음식에는 계급이 있고, 기호가 있고, 역사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음식 그림은 1960년대 팝아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주로 물질적 만족감을 표현하는 데 치중했다. 음식은 대개 깊은 신체적 만족감을 표현하는 메타포였으며, 음식에 대한 회화의 태도는 인간의 쾌락에 대한 이해와 그대로 포개졌다.
하이메 우게트의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양고기는 순교를 향한 종교적 욕망을 담고 있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은 호롱불 아래 감자를 나눠먹는 남루한 농민들의 모습을 통해 노동의 숭고함을 표현한다.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월스트리트 연회’는 찰랑거리는 세련된 샴페인 잔을 통해 1920년대 자본주의의 방탕한 속물성을 통박하고,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는 피타하야, 사포테 등 열대 과일을 그린 그림으로 고국 멕시코에 헌사를 바친다.
그러나 음식에 욕망을 투사하는 회화의 이런 태도는 팝아트가 등장하면서 달라진다. 앤디 워홀의 ‘200개의 수프 통조림’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주방 스토브’ 등으로 대표되는 팝아트는 음식의 먹음직스러움을 고의적으로 추방하며 음식의 위무적 효과를 조롱한다. 만화나 포스터처럼 그린 음식 그림을 통해 산업사회의 극심한 비인간화를 재치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역사학계를 호령하고 있는 미시사의 자기장 안에 놓여있는 이 책은 인문학과 예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개별 그림들을 쉽고 흥미롭게 해석해냈다. 그러나 매력적인 각각의 나무들을 포괄할 숲의 이름,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문을 뽑아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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