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법무법인에서 일하는 김상록(가명ㆍ36) 변호사는 3년 전 황당한 사건을 경험했다. B카드사로부터 연체자 대환대출(연체이자를 대출로 바꿔줌)과 관련한 공증업무를 줄 테니, 공증 수수료의 20% 가량을 현금으로 넘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카드사가 고객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공증 절차가 없다. 하지만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한 대출자에 대해 당시 일부 카드사들은 소송절차 없이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약속어음 공증을 받았다. A법무법인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 탐났지만 거절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 폭로를 계기로 기업들의 비자금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경영투명성을 높여 '클린 컴퍼니'를 지향하고 있지만, 대기업에서 중소기업까지 리베이트와 비자금은 독버섯처럼 퍼져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신뢰가 두터운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혹은 계열사 간 거래를 통해서다. 예를 들어 9억원의 비자금을 만들려는 C기업(원청업체)은 D기업(하청업체)으로부터 시가가 100억원인 물건을 110억원에 사준다.
D기업은 10억원중 110억원 거래로 인해 자신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부가가치세(1억원)를 떼고, 9억원을 현금으로 C기업에 돌려주는 방식이다. D기업은 현금으로 빠져나간 9억원을 가짜 영수증을 발행한 법인을 청산하거나 또 다른 계열사나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식으로 회계처리를 맞추게 된다.
하지만 요즘 이런 방법을 쓰는 기업들은 많지 않다. 국세청이 워낙 든든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하청업체 혹은 계열사 임원들의 급여통장을 이용하는 방법이 주로 쓰인다. 비자금 조성의혹에 휩싸인 삼성을 포함한 대기업들이 쓰는 스타일이다.
이를테면 E기업이 F업체 오너에게 1억원을 현금으로 넘겨줘야 한다면 E기업은 F업체로부터 1억원 조성을 위해 물건 값보다 더 많은 돈을 자사 임원 계좌에 상여금(개인소득세 포함) 명목으로 건네준다. 해당 임원은 이 돈을 F업체 오너가 원하는 차명계좌로 송금하거나, 특정인에게 현금으로 건네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별도의 회계 처리가 따라붙지 않기 때문에 '깔끔'하다고 한다. 물론, 이 방법은 임원들과의 두꺼운 신뢰관계가 쌓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김 변호사 사건처럼 '폭탄 선언'을 하면 회사 전체가 한 방에 휘청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세가 불분명한 부동산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을'이 '갑'에 돈을 밀어주기도 한다. 을이 갑에게 3억원을 넘겨줘야 한다면, 을은 시세가 잘 형성되지 않는 갑의 임야를 6억원에 사들이는 것이다.
이 방식은 기업 대 기업, 기업 대 개인, 기업 대 정치인ㆍ공무원 등의 거래에서 다양하게 쓰인다. 시세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고 해도 국세청의 칼날을 피하기 어렵다. 때문에 증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위 시세보다 30% 이상 비싸게 사지는 않는 게 관례다.
대기업들은 해외 법인이나 대리점을 통해 비자금을 만들어 특정계좌로 넘겨주기도 한다. 세무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아프리카 등 후진국이 주로 이용된다.
1,000만달러짜리 물건을 1,200만달러에 사들인 뒤, 대기업이 원하는 계좌나 페이퍼 컴퍼니로 돈이 흘러 들어가게 하는 방식이다. 옛 대우그룹의 비자금 조성 통로였던 ㈜대우의 영국 런던법인 금융조직인 'BFC'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국적 기업들 사이에서는 좀 더 복잡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I기업은 유럽 국가의 기간산업에 투자한다며 J시의 경전철을 통째로 사들인 뒤, `리스인(Lease in)-리스아웃(Lease out)'을 반복해 돈을 빼돌리기도 한다. 이 거래의 경우 미국 국세청(IRS)에서 탈세 및 불법 자금 조성 거래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유럽에서는 브로커까지 있다고 한다.
부 혹은 팀 단위의 비자금 조성을 위해 '유령 출장'도 동원된다. G기업의 H부서는 골프 캐디피, 술집 봉사료, 택시비 등 현금이 필히 동반되는 지출을 위해 서류 상으로 직원들을 출장 보낸다.
공사현장에 없는 '유령 인부'를 만드는 것과 같다. 해외출장의 경우 비행기 티켓 등 관련 영수증 첨부가 필요하지만, 국내 출장은 상대적으로 허술하다. 때문에 지방 출장자가 1명에 유령 출장자 2명을 보태 30만~40만원의 현금을 따로 챙긴다.
한 전문가는 "해외에서는 세계적인 컨설팅업체인 D기업 등이 세금 절약과 비자금 조성에 관한 패키지 상품을 팔고 있을 정도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기업과 비자금은 떼놓기 어려운 관계"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심한 각종 규제가 이 같은 비자금 조성을 부채질한다는 지적도 많다.
재계 관계자는 "불투명한 비자금 조성은 지양해야 한다"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규제가 심한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에선 공무원들과 감독당국에게 상납하지 않으면 인ㆍ허가가 안 나오거나, 마냥 늦어지는 사례가 많다"고 주장했다.
해외 비자금의 경우 개발도상국가나 후진국가의 각종 자원개발 및 투자 시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는 게 기업들의 지적이다. 이들 나라에선 유력정치인이나 관료들의 입김에 따라 각종 입찰 및 투자 인허가 등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박기수 기자 bless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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