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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 전설 '정세희' "이제 가수로 가슴뛰게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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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 전설 '정세희' "이제 가수로 가슴뛰게 해드릴게요"

입력
2007.12.10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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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이 땅의 젊은이들은 무언가 은밀한, 농염한, 걸쭉한 것을 찾기 위해 ‘야한’ 볼거리의 독점 공급원인 비디오 대여점을 찾곤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했으나 빨간 표시의 성인물을 꺼내기는 멋쩍다. 괜스레 쭈뼛거리며 진열장을 뒤지다가 가게가 한적해진다 싶으면 으레 던지는 대사.

“아저씨 좋은 것 좀 들어왔나요?”. 검은 비닐봉투에 비디오테이프를 둘둘 말아 집으로 향하던 모습. 그때를 추억하다 보니 1990년대 무려 250여편의 비디오에 출연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다 2005년 뇌종양으로 쓰러진 후 활동이 거의 없었던 에로배우의 대명사 정세희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녀를 만나러 압구정동의 한 바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이제 에로영화는 접었어요. 은퇴요? 안 하니까 은퇴죠. 호호.”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묻자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에로영화에서 정세희를 더는 볼 수 없게 됐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신작 비디오 리스트에서 그녀의 이름을 못 본 지 몇 년이 된 듯했다. 그녀의 설명인즉, 가수활동을 준비하느라 6년 전부터 영화는 거의 찍지 않았단다.

정세희는 에로배우 은퇴를 선언한 이유가 뇌종양 때문은 아니라고 말했다. 정상에 올랐지만 또 다른 정상을 탐하는 그녀의 도전정신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1990년대 초 데뷔 당시로 거슬러 올라갔다.

“20살이 갓 지났을 때였죠. 방송사 공채 탤런트 시험에서 아깝게 떨어진 저는 연기자가 될 수 없겠다는 불안함에 방황하고 있었죠. 마침 대학 선배가 ‘노출이 약간 있는’ 영화 출연을 제의했고, 정말 별생각 없이 촬영을 시작했어요. 첫 베드신은 충격이었죠.” 그녀가 들려주는 ‘얼떨결 데뷔기’다.

“그렇게 에로물 연기를 시작했지만 나름대로 꿈이 있었어요. ‘10년만 열심히 활동하면 사람들도 에로영화를 예술의 한 분야로 생각해 주겠지’ 하는 일종의 사명감이랄까. “그렇게 에로계에 몸담은 지 장장 15년입니다. 예전에 비해 에로영화와 배우에 대한 인식은 나아졌다고 생각해요. 이제 만족합니다.” 하지만 <두 여자가 사는 법> <정사수표> <신락원> 등으로 이름을 날리던 10년 전 그녀에게 쏟아진 시선은 동짓달 서릿발 만큼이나 차가웠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기, 선배들에게서마저 “포르노 배우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더라”며 “어디 가서 동문이라고 하지 마라”는 말을 듣던 기억은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 거기 비하면 토크쇼에 출연하고 대학 강단에서 특강까지 하는 요즘은 정세희에게 따뜻한 봄날이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가수다. ‘에로배우 정세희’라는 꼬리표가 너무나 강한 탓일까. 가수 정세희, 좀 생소하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2005년 1집 앨범 < SAY>를 낸 그녀는 어엿한 가수다.

활동을 준비하다 뇌종양으로 쓰러져 무대에는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무대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대단했다. “의류 쇼핑몰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오빠 믿지’ ‘틈’ ‘답’ 등 제 노래를 들을 때가 있어요. 얼마나 흥분되는지 모른답니다. 그 노래를 무대에서 한 번이라도 부르고 싶어요. 꼭 그렇게 할 거예요. 1집 앨범이 아직 살아 있잖아요.”

가수가 되려는 꿈은 그녀에게 모진 시련을 안겨줬다. 그래서 그 꿈은 더 애틋하다. 에로영화를 찍던 시절, 잘 나갈 때는 수입이 쏠쏠했지만 음반을 준비하면서부터는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전기가 끊겨 촛불로 어두운 방을 밝히면서도 ‘음반을 발표하고 나면 형편이 좀 나아지겠지’ 하고 버텼던 그녀는 뇌종양 진단을 받으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독일에서 수술을 받고 귀국했을 때는 정말 손에 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였다. 술 한 잔도 못하는 그녀가 빚을 내서 시작한 술장사.

그나마 꾸준히 찾아주는 이들 덕분에 굴러간다. 소아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도 주고 있다. “돈 많이 벌 거예요. 그래서 아픈 아이들을 더 도와주고 싶어요. 손님들도 동참하실 수 있도록 가게에 모금함도 설치할

계획인 걸요.”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었던 에로 영화판, 10여년을 거기 몸 담고 누렸던 에로배우로서의 성공, 뇌종양 투병으로 무너진 가수의 꿈, 그리고 그 꿈에 다시 도전하기까지.

순탄치 않은 정세희의 인생이다. 미래도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표정 만큼은 밝다. “가창력보다는 섹시 이미지가 강한 가수라는 것, 부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열심히 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예쁜 사랑을 키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거예요. 저도 평범한 여자랍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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