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최근 지방유세에서 "대선은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꾸는 선거가 아니라 집권세력 전체를 바꾸는 선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며 이번 대선의 핵심을 찌른 말"이라는 찬사가 나왔다. 정치인들의 언행이 하도 천박해서 그런지 품위를 지키는 박 전 대표의 말은 어느새 정치판의 중요한 에스프리가 돼버렸다.
상식에 바탕을 둔 평범한 내용인데도 그의 입을 통해 특정한 말을 들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어제도 그는 검찰수사와 이명박 후보 지원에 관해 분명한 언급을 했다.
■ 검찰 발표 후 굳어진 대선구도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대선은 근본적으로 집권세력의 연장이냐 교체냐를 가름하는 정치행사다. '잃어버린 10년'의 폐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번에 지면 또다시 무능한 좌파 세력에 나라를 내주게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존 집권세력과 그 지지자들은 부패한 보수세력이 집권하면 안 된다고 믿고 있다.
이 쪽이나 저 쪽의 골수 지지층이 아닌 중간지대 사람들은 그래서 고민이 깊다. 그런 중간지대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이번 대선에 대한 실망감을 "한 쪽은 빨갛고 다른 쪽은 시커멓고…"라는 말로 표시했다. 한 쪽은 이념적으로 싫고, 다른 쪽은 부정직 부패 이런 게 싫어 투표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빨갛고 시커먼지,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빨갛고 시커먼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각인돼 있다. 이번 대선에서는 좌와 우의 대립에 더해 적과 흑의 이 갈등과 길항(拮抗)이 투표행위의 큰 결정요소가 된 것처럼 보인다.
좌파라고 모두 무능하고 우파라고 반드시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검찰이 BBK의혹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한 이후 이런 인식과 대립의 구도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이명박 후보 대 반 이명박 전선의 경쟁구도가 확실해졌다. 정동영 후보가 어제 긴급기자회견에서 검찰까지 싸잡아 수구부패동맹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이번 대선은 역대 최악이거나 저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선 투표율이 가장 낮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20년 전 89.2%였던 투표율은 그 뒤 81.9(1992), 80.7(1997), 70.8(2002)%로 낮아져왔고, 이런 추세라면 이번에는 60%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 투표율이 계속 70%대 이상으로 높아야 할 이유는 없다.
민주주의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우리는 아직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원론적인 의미에서 유권자들은 마땅히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 어쨌든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주요 후보들은 각자 좋은 대통령, 실천하는 경제대통령,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 부지런한 대통령, 믿을 수 있는 경제대통령, 듬직한 대통령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 중에는 당연히 현직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과 반대 되는 이미지를 강조한 것도 있다. 어쨌든 다 좋은 말이며 누가 당선되더라도 이런 모습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되든 겸손해야 한다.
BBK의혹에서 벗어나게 돼 홀가분해진 이명박 후보는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가장 당선이 유력한 사람이다. 그는 검찰 수사 발표 후 낮은 자세와 국민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강조했다. 당연한 다짐이지만 후보만의 약속으로 끝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도 비슷한 다짐은 계속해왔지만 당내 불협화음과 말썽이 그치지 않았다.
■ 진정 '국민이 대통령인 나라'를
지금의 집권세력도 초기에는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국민은 대통령에 의해 무시되거나 박대 당했다. 더 큰 문제점은 국민에게 대통령 걱정을 하게 만든 점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과 자리를 다 차지하는 배타적 승자독식의 문화도 노무현 행정부에서 더 두드러졌다.
이런 행태는 이제 완전히 지양돼야 한다.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행동함으로써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연습을 선거 전부터 계속해 몸에 배게 해야 한다. 집권세력이 오만하면 국민은 살기 힘들어진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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