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생가는 우리들의 로테르담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외무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생가가 ‘에라스무스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기념관이 된 것은 2005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외무부는 경영대학과 의과대학의 명망이 드높은 에라스무스 대학교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 전부터 있었던 단과대학들이 합쳐져 에라스무스대학교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지가 2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1992년 10월, 우리들 ‘유럽의 기자들’이 로테르담에서 본 것은 시청사, 거대한 항구(유로포르트), 피임약 제조업체, 극장무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로테르담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에라스무스다. 나만이 아니라, 그 도시에 별다른 인연을 만들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그럴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지금부터 550년쯤 전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고향을 떠난 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담이 낳은 가장 유명한 자식이다.
그가 로테르담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름에서부터 또렷하다. <우신예찬> (1511)으로 한국에도 적잖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이 인문주의자의 정식 이름은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인데, 이것은 ‘로테르담의 사랑받는 갈망’이라는 뜻이다. 우신예찬>
현대 유럽어에서도 그는 흔히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이를테면 영어로는 Erasmus of Rotterdam, 프랑스어로는 Erasme de Rotterdam)라 불린다. 그 시절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지만, 이 불세출의 인문주의자는 제 이름에 고향 이름을 단 채 한 평생을 살았다.
인문주의자라는 말은 그 시절 고전어(고전희랍어와 라틴어)를 연구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당대의 일급 지식인들에게 고전어는 숨쉬는 공기 같은 것이었지만, 에라스무스는 이 분야의 연찬이 그들 가운데서도 출중했다. 라틴어 번역과 주석을 곁들인 희랍어 신약성서의 첫 인쇄 교주본이 그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기독교 이전 고전 문헌의 전문가들로서, 인문주의자들이 교회의 독단에 비판적 눈길을 보낸 것도 자연스러웠다. 에라스무스도 그랬다. 가까운 벗 토머스 모어의 런던 집에 잠깐 머무는 동안 아무런 참고문헌 없이 단숨에 내려썼다는 <우신예찬> 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위선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선드러진 박람강기 속에 실어내고 있다. 우신예찬>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정신은 균형의 정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도 놀려먹었던 가톨릭교회를 허물어내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그의 희랍어 교정본을 독일어로 옮기며 종교개혁의 깃발을 치켜든 마르틴 루터는 여러 차례 에라스무스에게 손을 맞잡자 제안했으나, 로테르담 출신의 인문주의자는 끝내 제 발걸음을 반-가톨릭 운동으로까지 내딛지는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가톨릭 광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 광신자들의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로테르담은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지만, 지성의 역사에 이 도시 이름이 적힌 것은 거의 온전히 에라스무스 덕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정신을 고향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1996년 이 도시를 관통하는 니위어 마스 강에 에라스무스교(橋)가 놓인 뒤에도, 대부분의 로테르담 시민들은 에라스무스를 그 다리의 설계자 이름으로 여겼다 한다. 로테르담시가 부랴부랴 에라스무스의 생가를 기념관으로 만든 것은 위대한 선조에 대한 시민들의 이 무관심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로테르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공군의 폭격으로 도심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네덜란드 쯤은 하루면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가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려 당황한 독일군 지도부는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정했고, 지도 위에서 로테르담을 찍었다. 그리하여 로테르담은 폐허가 됐고, 네덜란드는 개전 닷새만에 항복했다.
종전 뒤 도시를 재건하면서, 로테르담시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조각가 오시프 자드킨에게 그 끔찍한 공습을 상징하는 작품의 제작을 위촉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처칠 광장 가두리에 서 있는 <심장 없는 도시> 다. 심장>
로테르담 시청은 1940년 5월의 독일군 공습 때 기적처럼 폭탄을 피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 시청사는 그 때나 지금이나 네덜란드의 시청 건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아침 일찍 암스테르담 근교 알스메르의 꽃 경매장을 둘러본 뒤 버스를 달려 로테르담 시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졸음과 싸우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시장(市長)의 일장 연설도 시 직원들과의 간담회도 비몽사몽으로 넘겼다.
오후에 들른 피임약 제조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정신이 맑았다면, ‘피임의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해주는 그 곳 직원들 앞에서 나는 꽤 스스러워했을 것이다. 지금 그 공간의 기억에서 내가 뽑틂?수 있는 말은 ‘필(pill: 경구피임약)’ 밖에 없다. 두 시간 남짓 동안 ‘필’이라는 말을 수 백 번은 들은 것 같다.
공장을 나왔을 때, 영국인 동료 조애너가 내 등을 치며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졸음이 가시며 말놀이가 흘러나왔다. “나는 알약을 벗기네, 나는 알약을 채우네, 나는 알약을 느끼네(I peel a pill, I fill the pill, I feel the pill.)” 조애너는 내 등을 다시 한 번 세게 치며 껄껄댔다. 그녀의 웃음은 사내처럼 호탕하다.
그것도 인연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로테르담이라는 도시 이름이 내 뇌리에 처음 새겨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난생 처음 ‘해외펜팔’이라는 걸 해보았는데, 그 상대가 로테르담에 사는 여학생이었다.
그 시절엔 ‘까진’ 중학생들 사이에 해외펜팔이라는 게 꽤 유행이었다. 요즘의 결혼중개업소처럼 사무실을 차려놓고 회원을 모아 돈벌이를 하는 펜팔업체들이 회현동 일대에 여럿 있었다. 학생 잡지에 그런 펜팔업체 광고가 나곤 했다.
나 역시 학생 잡지의 광고를 보고 해외펜팔이라는 허영놀이를 해볼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반 친구 하나와 중앙우체국 뒤 어느 골목의 ‘뒤뽕빌딩 306호’를 찾아가 약소한 회비를 내고 먼 나라에서 온 편지를 받아온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 펜팔업체의 이름은 기억에 없는데, 묘하게도 그 업체가 입주한 건물 이름과 홋수는 지금까지 잊지 않았다. 기억이라는 게 워낙 선택적이기도 하지만, ‘뒤뽕빌딩’이라는 이름의 어감이 재미있어서 그리 됐을 것이다.
펜팔 상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편지에 무슨 얘기를 썼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저 ‘까진’ 중학생의 영어 수준에 맞는 얘기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관례대로 사진도 주고받았는데, 만만찮은 비만소녀였다. 어린 생각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다?’ 하고 넘겨짚기도 했다. 그 때로부터 20년쯤 뒤에 발을 디딘 로테르담에는 날씬한 여자도 있었고 뚱뚱한 여자도 있었다.
처음 그라나다에 갔을 땐, 사진으로만 본 대학 시절의 펜팔 수사나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러나 로테르담에선 내 첫 펜팔이 이 도시 아이였다는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수사나와는 여러 해 동안 꽤 의젓한 얘기를 나누었지만, 로테르담 소녀와는 유치무쌍(했던 것이 분명)한 편지가 대여섯 번 오간 뒤 편지질이 끊겼기 때문이다.
머리가 좀 익은 뒤였다면, 로테르담 소녀와도 에라스무스에 대해, 추상표현주의 화가 빌렘 데 쿠닝(그도 고향이 로테르담이다)에 대해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의 나는 데 쿠닝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어쩌면 에라스무스라는 이름도 귀에 설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데쿠닝은 물론이고 에라스무스도 내 관념 속의 로테르담 사람일 뿐이다. 내 경험 속의 로테르담 사람들은 ‘유럽의 기자들’ 동료들이다. 로테르담의 어느 저녁에, 역시 네덜란드 외무부의 배려로 이 동료들과 함께 무용 공연을 보게 됐다.
지루했다. 막간에 로비로 나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동료들과 잡담을 하던 중 샹송 얘기가 나왔다. 일본인 동료 시노부가 살바토르 아다모를 좋게 평하기에 나도 동의해 주었다. 한국으로 치면 ‘트로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아다모의 몇몇 샹송은 내 10대 때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벨기에 동료 귄터가 밉살스럽게 끼여들었다. “유럽에서 아다모는 삼류 가수야. 샹송이라면 자크 브렐이나 조르주 브라생스 정도는 돼야지.” 그러면서 그는 “클래스!” “클래스!”를 호들갑스럽게 반복했다. 시노부가 더 밉살스럽게 배신의 언어를 날렸다. “물론 브렐이나 브라생스가 훨씬 낫지. 그 사람들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어.”
나까지 아다모를 배신하기는 싫었다. “백 사람에겐 백 가지 취향이 있지. 난 아다모랑 계속 살려네.” 그러고 나서 나는 어린 시절 우상의 <눈이 내리네> (Tombe la neige)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귄터가 제 귀를 막았다. 눈이>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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