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침없이' 힘실린 푸틴…
“기분이 좋습니다. 신께 감사합니다. 선거는 끝났고 유권자들은 그들의 선택을 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일 TV에 나와 총선 결과에 대한 만족감을 감추지 못했다. 유권자들은 고유가에 힘 입은 고도 경제성장, 미국에 맞서는 강국으로서의 위상 확보, 정치적 안정 등을 이룩한 푸틴 대통령의 통합러시아당에 몰표를 던지며 그에게 화답했다.
푸틴 대통령이 어떻게 정국을 요리해 나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내년 중반이면 누가 러시아를 통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여전히 답할 수 없다”면서 “러시아는 정치적 불안정의 새로운 시기로 들어섰다”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총선을 계기로 통합러시아당이 우호정당과 연합할 경우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한 것은 확연히 달라진 정치환경이다. 여기에다 푸틴 대통령의 최근 발언을 종합하면 그가 향후 취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유추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총선 직전 “국민이 통합러시아당을 밀어주는 것은 향후 통치를 해나가는데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말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단체에 참석해 “총선과 내년 3월 대선을 계기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태동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러시아의 정치 분석가 올가 크리시타노브스카야는 이날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이 내년 5월 퇴임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집권당이 정부를 장악하는 소비에트 통치 모델을 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푸틴 대통령이 당수로 권력을 행사하고 차기 대통령은 그의 지시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는 푸틴 대통령의 그간의 발언과도 일치한다. 당비서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소비에트 통치 모델은 러시아 국민에게 친숙하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을 것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차기 대통령이 업무 개시 후 자진사퇴하고 푸틴 대통령이 권좌에 복귀하는 시나리오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공언해온 “3기 연임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위배되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의중에 충실한 인물을 통합러시아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정치 분석가 스태니슬라프 벨코프스키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권력자든 일단 집권하면 권력을 강화하는 속성이 있다”면서 “내년에 후임 대통령이 당선되면 푸틴 대통령의 입지가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저런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이 내년 5월 대통령 임기를 마치더라도 정치적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 '속절없이' 힘빠진 차베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2일 치러진 개헌안 국민투표에서 뼈아픈 일격을 당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처럼 영구집권을 기도하며 러시아 총선과 같은 날을 '길일'을 택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엇갈렸다. '우회도로'를 택한 푸틴과 달리 무모하게 '정면돌파'를 시도한 것이 패인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 전국선거위원회는 국민투표 개표 결과 찬성 49%, 반대 51%로 개헌안이 부결됐다고 3일 밝혔다. 투표율은 56%였다. '근소한 차이'라며 공식 개표 결과 전까지 출구조사 결과 발표를 금지했던 베네수엘라 정부는 "결과를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새벽 1시 20분 결과가 발표되자 거리를 점거하며 시위를 벌였던 반대파들은 거리로 몰려 나와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등 환호성을 올렸다. 반면 마지막까지 근소한 차이로나마 개헌이 통과될 것이라고 믿던 차베스 지지자들은 낙심한 표정이었다.
차베스 대통령은 TV로 중계된 기자회견을 통해 "반대파의 승리를 축하한다"며 국민의 선택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지난해말 62%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한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달초까지도 59%에 달하는 굳건한 지지율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개헌안 국민투표가 부결된 것은 결국 빈곤층에 대한 부의 재분배 등 차베스의 개혁을 지지하는 유권자 중에서도 영구집권과 같은 비민주적 체제 도입에는 반대하는 세력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올해 차베스 대통령이 반 차베스 성향의 방송국인 RCTV를 폐쇄해 반대시위가 벌어졌을 대도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찬성보다 많았다.
개헌안 국민투표를 계기로 분열돼 있던 반 차베스 세력들이 하나로 뭉친 것도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오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악마'로, 스페인 전 총리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등 막말을 일삼으며 세계 언론을 장식한 것도 그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렸다는 분석이다.
차베스 대통령이 "나를 지지하면서 투표에서 반대표를 찍는다면 배신자"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사활을 걸었던 만큼 이번 국민투표의 패배는 그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개헌안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 철폐 뿐 아니라 자원 및 민영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적 정책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차베스 대통령의 사회주의 개혁 노선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뿐만 아니라 차베스 대통령을 모델로 역시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없애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 중인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등의 개헌 시도도 중단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국민투표에서 투자 기업 등을 통해 야당을 암묵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등 서방은 오일 파워로 목소리를 높인 차베스 대통령의 파워를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됐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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