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한마디로 말해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깨쳐야지 이론이나 논리를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안거(冬安居) 결제(24일)를 맞아 올해로 총림(叢林) 지정 40주년을 맞은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았다. 총림은 스님들이 선 수행을 하는 선원과 교학을 배우는 강원, 스님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배우는 율원이 함께 있는 불교의 종합수도원으로 1967년 처음으로 해인사에 문을 열었다. 그 해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성철 스님(1912~1993)은 3개월의 동안거 기간에 매일 불교의 중도(中道)사상을 설파하는 ‘백일법문’을 펼쳐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고, 그 영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인총림의 선(禪)수행을 이끌고 있는 수좌(首座) 스님은 성철 스님의 직계 제자로 30년 이상 참선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원융(圓融ㆍ69) 스님이다.
23일 저녁 성철 스님이 생전에 머물렀던 백련암에서 만난 원융 스님은 “아직 공부도 다 안됐고 나서서 남한테 말할 처지도 못 된다”면서 말을 아꼈다. “30,40년을 수행했지만 아직도 못 깨쳤습니다. 총림이 세워진 지 40년인데 그 동안 깨달음을 얻은 도인(道人) 하나 나오지 않아 부끄럽기만 합니다.“
원융 스님은 그러면서도 “불교 신자든 아니면 누구라도 화두를 지니고 한 순간도 끊어짐 없이 간절히 참구하면 어느 날 홀연히 깨칠 순간이 온다고 확신한다”며 참선 수행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나온 원융 스님은 공무원으로 일하다 30대 중반에 뒤늦게 발심해 72년 늦깍이로 성철 스님 문하에 들어가 해인사 백련암과 퇴설당 등에서 수행 정진해 왔다. 성철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곁에서 모셨고, 성철 스님이 생전에 “부처님 앞에 밥값을 했다”고 자부했던 법어록 <본지풍광(本地風光)> 과 <선문정로(禪門正路)> 등을 법정 스님, 원택 스님 등과 함께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선문정로(禪門正路)> 본지풍광(本地風光)>
원융 스님은 성철 스님 아래서 공부하던 과거에는 물자가 풍족하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그에 비해 요즘은 옛날보다 시설도 훌륭하고 시간도 헐렁한데다 스님들도 합리적으로 공부하려고 한다면서 “매화가 찬 기운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듯이 뼛골에 사무칠 정도로 고생해서 수행해야 진짜 공부”라고 말했다.
최근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한 송(宋)나라 대혜 스님의 <서장(書狀)> 을 편역해 낸 원융 스님은 “이오위칙(以悟爲則), 즉 깨침을 법칙으로 삼으라는 것이 참선의 도리”라면서 “수행자는 조용한 곳 뿐만 아니라 소란스러운 시장바닥에서도 화두를 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장(書狀)>
계속해서 깨침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님은 최근 여러 총림과 선원의 생활을 규율하는 청규(淸規)를 통일하자는 일부 목소리에 대해 “도량마다 가풍이 있고 서로 다른데 하나의 덩어리로 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말했다. 원융 스님은 “나이 70이 돼 몸이 예전 같지 않지만 어쨌든 죽을 때까지 화두를 놓치지 않고 참구할 것”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24일 오전 경내 보경당에서 열린 동안거 결제 법회에는 해인선원에서 수행하는 40여명의 선승들을 비롯, 여러 산내 암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참석했다. 해인총림 방장인 조계종 종정 법전(法傳) 스님은 법문을 통해 “말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뛰어난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주인의 뜻에 따라 달리며, 그 다음은 채찍이 털 끝에 닿아야 달리고, 세 번째는 채찍이 몸뚱이에 닿아야 달리며, 네 번째는 채찍의 아픔이 뼈에 사무쳐야 달린다”면서 가장 뛰어난 말처럼 선 수행에 정진할 것을 격려했다.
한편 해인사는 이날 2005년 국내 최고(最古)의 통일신라 시대 목불(木佛)로 판명된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을 안치한 대비로전 낙성식을 가졌다.
합천=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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