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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25·끝> 게임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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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25·끝> 게임아트

입력
2007.12.0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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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 부활한 예수는 자신을 만져보려 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예수의 말이 오랫동안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지켜야 할 철칙이었다. 즉 미술관 안에서 관람객이 작품에 손을 대는 것만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작품은 오직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요즘은 달라졌다. 외려 작품들이 자기들을 만져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관객이 만져주지 않는 작품은 외려 관심을 끄는 데에 실패한 것으로 간주된다. 눈으로 작품을 보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 관객은 ‘손’으로 작품을 만져야 한다. 미디어 아트가 등장한 이후 달라진 미술관의 풍경이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낳은 걸까?

과거에 이미지를 대하는 대중의 태도는 수동적이었다. 미술관에서 원작 회화를 보거나, 신문이나 잡지에서 사진을 그저 보는 데 그쳤다. 하지만 오늘날 대중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이미 포토샵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복제, 합성, 변조하고 있다.

인터넷에 널린 것이 바로 대중들이 스스로 만든 이미지들. 대중은 더 이상 주어진 이미지를 완성된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미지는 앞으로 자신들 스스로 합성하거나 변조시켜 다른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원재료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타이타닉에서 죽었던 디카프리오가 살아 돌아왔다! 언젠가 본 UCC의 내용. 첫 장면에서 디카프리오가 북해의 물속으로 가라앉더니, 다음 장면에서는 물을 흠뻑 뒤집어 쓴 채 물에서 튀어나오고, 이어 경찰에 이리저리 쫓겨 다닌다.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새로 편집해 대중이 만들어낸 새로운 영화였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TV나 영화의 쇼트를 재료 삼아 대중들이 창조한 동영상들이 차고 넘친다. 간단히 외국영화에 자막만 새로 달아 다른 내용으로 변조시키는 게 있는가 하면, 위의 예처럼 정교한 편집으로 아예 완전히 새로운 동영상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대중은 이미 동영상마저 완성품이 아닌 원재료로 취급하고 있다.

대중의 상호작용(interactivity)을 통해 움직이는 영상 중의 하나가 바로 컴퓨터 게임이다. 대중은 동영상과 피드백을 하면서 모니터 위에서 상황을 변화시켜 나간다. 기존의 영화나 소설이 이미 완성된 줄거리를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했다면, 컴퓨터 게임에서는 대중이 스스로 작가 혹은 배우가 되어 줄거리를 창조해 나가게 된다.

이것만으로는 대중의 극성스러운 참여욕을 보장해주는 데에 부족하다고 느낀 걸까? 컴퓨터 게임까지도 새로운 예술을 위한 재료로 취급하는 장르가 있다. 바로 ‘게임 아트’라고 하는 것이다. 가령 중국의 작가 펭 멩보의 작품을 보자. 아예 컴퓨터 게임에 사용되는 엔진을 재료로 이용해 아예 자신이 게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펭 멩보가 사용한 것은 Q3A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 이를 이용해 그는 게임 속 캐릭터에 자신의 얼굴을 ‘스킨’으로 입힘으로써 자신을 게임의 주인공으로 바꾸어 놓았다. 게임 엔진을 그대로 이용한 작품이기에, 관객은 한 손에 무기를, 다른 한 손에 캠코더를 든 저 작가의 캐릭터를 움직여 직접 게임을 할 수가 있다.

기존의 소프트웨어를 전용하는 대신에 아예 다시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가령 코리 아르캔절의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는 닌텐도 게임의 카트리지를 다시 프로그래밍한 아트라 할 수 있다. 즉 1980년대에 유행하던 닌텐도 게임의 포맷을 빌려다가, 캐릭터를 60년대 문화적 아이콘으로 바꾸어 놓고 다시 프로그래밍한 것이다.

이 작품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게임이다. 게임에서 사용자의 과제는 앤디 워홀을 쏘는 것. 하지만 화면에 나타나는 인물들 중에 절대로 다른 사람들은 쏘면 안 된다. 가령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든지, KFC 할아버지 커넬 샌더스. 이 패러디로 작가는 워홀의 저격이라는 무거운 사건을 가벼운 문화적 기억으로 바꾸어 놓는다.

문제는 컴퓨터 게임의 폭력성이다. 대부분의 컴퓨터 게임은 손과 발을 이용한 격투, 칼과 창을 이용한 결투, 혹은 총과 포를 이용한 전쟁의 상황을 재연한다. 이로써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미학적 쾌감으로 느끼게 한다. 최첨단 디지털 기기마저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원시적 폭력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이 언제까지 폭력에 의존해야 하는가? 캐스린 루이즈의 <뱅뱅> 은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게임은 총으로 산 사람을 쏴서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캐스린 루이즈의 작품은 이 상황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다. 이 게임에서는 총으로 죽은 사람을 쏘면, 죽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부활을 한?

미디어 예술가의 창조성은 그 미디어를 만든 사람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용도를 찾아내는 데에 있다. 캐스린 루이즈는 컴퓨터 게임의 용도를, 게임 개발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이로써 버추얼 공간의 폭력성, 거기서 쾌감을 느끼는 원시적 감성, 그로 인한 폭력에 대한 무감각 등을 성찰하게 만들어준다.

성서에 따르면, 심판의 그날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되살아난다고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이버 공간에서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죽어가고 있을 게다. 하자만 그렇게 죽은 사이버 인간들이 모두 무덤에서 되살아 나온다고 생각해 보라. 작가는 아주 간단한 발상의 전환으로 죽음이 횡행하던 버추얼 공간에 대부활의 기적을 연출한 셈이다.

인쇄된 글은 완성품으로 주어지나, 모니터 위의 전자 텍스트는 언제라도 복제, 변형, 편집이 가능한 반제품의 상태다. 오늘날엔 영상도 그런 상태로 변했다. 심지어 그 자체가 대중과 동영상의 인터랙티비티인 컴퓨터 게임마저 이제는 완제품이 아니라, 조작을 가해 다른 게임으로 변신시킬 수 있는 반제품일 뿐이다. 부활한 것은 대중이다. 과거의 죽은 대중은 오늘날 산 대중으로 부활했다.

■ 게임엔진 이용해 만든 영화 '머시니마'/ 국제영화제 열릴 정도로 독자적 장르로 자리잡아

대중을 영상의 창조자로 만들어주는 대표적 장치 중의 하나가 '머시니마'다. 머시니마(machinima)는 머쉰(machine)+시네마(cinema)의 합성어로, 전문적인 CG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기존의 게임 엔진을 이용해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를 가리킨다. 시네마 속의 'e' 대신 'i'를 쓴 것은, 애니메이션('ainma')까지 포괄하는 어감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머시니마는 원래 게이머들이 이미 지나간 게임의 상황을 리플레이하게 해주는 장치에서 시작됐다. 그러던 것이 게임 상황을 캡처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사용자가 스스로 줄거리를 짜서 극을 진행시키는 단계까지 발전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국제 영화제가 열릴 정도로 머시니마는 하나의 독자적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컴퓨터 게임을 위해 개발된 그래픽 장치를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에는 따로 비용이 들지 않는다. 보통의 CG 애니메이션과 달리 PC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렌더링을 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 용량도 많이 잡아먹지 않아 손쉽게 전송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최초의 머니시머는 1996년에 나온 '다이어리 오프 캠퍼'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퀘이크(Quake)라는 1인칭 사격 게임의 엔진을 이용해 만든 이 작품은 100초 남짓 밖에 안 되는 짧은 길이였지만, 그 안에 이미 완결된 스토리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게임을 이용해 만든 이른바 '퀘이크 무비'들이 성행하게 된다.

게임에 그치는 게 아니다.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영화들도 있다. 이 역시 영상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가 변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머시니마처럼 핸드폰 영화 역시 이미 국제 영화제가 개최될 정도로 발전했다. 대중은 영상의 소비자로 그치려 않고, 적극적으로 영상의 창조자가 되려 한다.

영상의 창조자가 되려는 대중들의 눈에 완성품, 완제품이란 없다. 회화든, 사진이든, 게임이든, 핸드폰이든, 그들의 눈에 모든 이미지는,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그저 창작을 위한 원재료, 가공을 위한 반제품으로 보일 뿐이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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