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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병영·마량' 돌담길엔 하멜 숨결… 항구엔 제주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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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병영·마량' 돌담길엔 하멜 숨결… 항구엔 제주의 향기

입력
2007.12.0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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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 있다. 특별한 산세도 아니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데도 말이다. 강진을 지나는 많은 이들이 하는 소리다. 그래서 아예 눌러 사는 이들도 있다.

강진의 지명은 도강(道康)과 탐진(耽津)이라는 두 고을이 하나로 합쳐진 데서 유래한다. 도강은 강진의 윗마을인 지금의 병영 작천 성전 옴천 일대, 탐진은 강진읍과 군동 도암 신선 칠량 대구 일대의 아랫마을들이다. 도강과 탐진의 마을 중 지금껏 과거와 소통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 두 곳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 병영마을 하멜의 돌담길

도강의 한복판에 있는 병영마을은 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자리했던 군사도시다. 군의 중심지이면서 사람과 물자가 집산하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병영마을 한복판에는 진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 우리네 정서가 녹아 든 옛 돌담길 ‘한골목’이다. 큰길을 ‘한길’이라 불렀듯 골목치고는 넓고 담이 높아 ‘한골목’이라 불린다.

돌담의 높이는 2m를 훌쩍 넘는다. 말 타고 다니는 병사들로부터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함이다. 흙과 돌로 이뤄진 돌담에는 블록담에서 느낄 수 없는 생명이 있다. 두꺼운 이끼가 지붕을 하고, 풀꽃이 비어져 나와 생을 움 틔운다.

한적한 돌담길을 걷다 보면 담 안쪽서 컹컹대며 정적을 깨는 강아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콩을 까는 할머니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곳 돌담의 모양은 특이하다. 작은 돌들을 20~30도 기울여 층층이 쌓은 뒤 흙으로 다지고 다시 엇갈리게 돌들을 쌓고 다져 만든 돌담이다. 이 지그재그 빗살무늬의 돌담은 <하멜표류기> 의 주인공 하멜에서 기원한다.

1653년 제주에 표류한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 이송됐다가 이곳 전라 병영에서 7년을 살았다. 그들이 이곳에서 잡역을 할 때 네덜란드식 빗살무늬 돌담을 전수해줬다고 한다.

하멜이 고향 생각을 하며 붙들고 울었던 800년 된 은행나무 옆에 하멜기념관이 3일 개관한다.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 호르쿰시에서 많은 전시물을 기증받았다. 하멜 동상과 대포, 한국에 전래된 나막신 등과 하멜시대 네덜란드 생활용품 30여점이 전시된다.

■ 제주말의 중간 보금자리 마량항

마량은 강진의 유일한 항구다. 강진 사람들은 싱싱한 회가 생각나면 ‘미항’이라 자부하는 마량으로 달려간다.

제주나루 ‘탐진’의 이름처럼 강진은 제주(탐라)를 잇는 주요 교통축이었다. 조류의 흐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제주의 말을 싣고 처음 정박하는 곳이 마량이다. 이곳에서 말들은 몇 개월간 배멀미를 털어내고 원기를 회복해서는 전국 각지의 필요한 곳으로 달려간다. 마량의 원마, 숙마, 신마 등의 지명은 그 제주말에서 연유한다.

1970년대만 해도 마량 해안에는 제주의 현무암 무더기들을 볼 수 있었다. 말을 싣고 올 때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배 밑에 쌓아두었던 돌들이다. 마량에 온 배들은 다시 제주로 가면서 돌 대신 곡식을 싣고 갔다.

마량항 공연무대 앞에는 돌하루방 한 쌍이 서있다. 제주와 마량의 인연을 기리기 위해 제주에서 보내준 선물이다. 7일 제주지사가 직접 찾아와 제막식을 갖는다.

지난 6월 고금대교가 연결돼 마량항 바로 앞에 버티고 선 고금도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마량항 초입의 바다에는 자그맣고 둥그런 섬 2개가 떠있다. 울창한 숲으로 덮인 이 섬을 주민들은 까막섬이라 부른다.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된 이 섬에는 열대성 난대림 120여 종이 우거져 있다. 희귀식물의 보고다. 강진군청 관광개발팀 (061)430-3172

강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다산 유배생활 주막집 복원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에 또 하나의 답사 명소가 탄생했다.

큰고니 날아드는 강진은 다산 정약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땅.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보냈다.

강진읍 동성리 동문밖샘 바로 앞에 다산이 처음 강진에 와서 머물렀던 주막집,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가 10월 말에 복원돼 일반에 공개됐다. 다산이 묵었던 주막집 골방은 그가 당시 이름지었던 대로 ‘사의재(四宜齋)’란 현판을 달았다.

사의재란 다산이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자신에게 다짐하며 붙인 이름이다.

이 주막집 노파는 당시 다산이 처음 강진에 유배왔을 때 유일하게 그를 따뜻하게 받아준 사람으로 전해진다. 강진 사람들 모두 ‘천주학쟁이’로 쫓겨온 다산을 경계했고, 다산 스스로도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그냥 헛되이 사시려는가. 제자라도 길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려깊은 주막집 할머니의 얘기에 다산은 스스로를 추스렸다고 한다. 다산은 사의재에서 1801년부터 1805년까지 4년을 머물며 강진읍의 여섯 제자를 키웠고, <경세유표> <애절양> 등을 지었다.

이후 다산은 보은산방에서 2년, 6제자중 막내인 이학래의 집에서 2년을 머물다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으로 옮겨 10년을 거처하며 <목민심서> 를 비롯한 600여 권의 방대한 저술로 실학을 완성했다.

복원된 주막 건물에선 손님들에게 주안상도 내놓는다. 이곳을 안내하는 문화유산해설사는 모두 7명. 이중 6명의 여성 해설사들이 3인 1조 2교대로 ‘주모’를 자청하며 주막을 지킨다. 직접 추어탕, 도토리묵, 메밀묵, 파전, 차, 동동주를 내놓고 이곳의 역사를 함께 설명한다. 해설하랴 음식 만들어 내랴, 청소하고 설거지까지 그 힘든 일을 견뎌내게 하는 것은 오직 다산에 대한 사랑 하나다.

문 연지 이제 한 달이 넘었지만 벌써 다산을 흠모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어느 지역의 군수를 지냈다는 한 노신사가 찾아와 사의재 툇마루에 한참을 걸터앉아 있더니 유배 온 다산의 당시 서럽던 심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고 주모들은 전한다.

강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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