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상형문자에서 보듯, 글자와 그림은 본래 한몸이었다. 무언가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담는 그릇으로서, 그들은 오랫동안 자웅동체의 운명에 속박돼 있었다. 이후 문명의 발달과 함께 해리된 문자와 이미지. 그들은 영영 그렇게 결별한 걸까.
기호범람의 시대, 문자언어와 이미지언어의 상호 넘나듦을 조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린다.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28일부터 시작되는 ‘언어적 형상, 형상적 언어: 문자와 미술’전. 이응노, 김창열, 오수환, 김홍주 등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부터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진 작가들까지, 문자기호로 이미지형상을 만들거나 이미지로 문자를 표현하는 작가 26명의 작품 98점을 모은 전시다.
‘언어적 형상: 글 그리기’라는 제목의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문자가 지닌 조형성과 상징성을 이용해 글자를 이미지화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한국미술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응노의 문자추상 시리즈와 ‘물방울 작가’ 김창열의 ‘회귀’ 시리즈를 시작으로 현대소비사회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고급 브랜드들의 로고를 전통 문자도 형식으로 변환한 손동현, 쌀알로 ‘쌀’이라는 커다란 글자를 빚어내고 콩팥알로 콩팥의 형상을 주조하는 이동재의 작품 등이 선보인다.
폭포 굉음인 ‘슈’라는 깨알 같은 글씨들을 화소 삼아 전통 산수화풍의 폭포를 그린 유승호의 작품은 미술이 시각적 경험에 한정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며 이미지의 청각화를 경험케 한다.
‘언어와 형상: 글과 그림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두 번째 전시실에는 그림 속에 특정 단어나 문장이 곁들여진 작품들이 모였다. 이미지와 병렬된 이 문자들은 작품 해석의 코드가 되기도 하고, 의미의 불확정성으로 인해 작품을 미궁에 빠뜨리는, ‘표류하는 기호’로 작동하기도 한다. 너울거리는 붉은 꽃과 ‘Something irresistible’이라는 구절이 모호하게 어우러지는 김종학의 ‘불꽃’, 영시의 구절을 점점이 새긴 크리스털로 눈물 모양을 형상화한 황혜선의 ‘흘리지 못한 눈물’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마지막 전시실인 ‘형상적 언어: 그림 쓰기’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문자텍스트의 제시를 통해 시각적 조형성과 언어적 메시지를 동시에 구현하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하면 되디’, ‘질리는 나의 빚’, ‘질풍로또의 시대’, ‘남자는 배 여자는 가슴’ 같은 유머러스한 시대비평을 학급교훈 액자 속에 먹글씨로 써넣은 박정연의 작품들은 형식과 내용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촌철살인이 유쾌하다. 초콜릿 가루처럼 보이는 쇳가루로 작가 고유의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을 그린 후 작품을 세워 글자들을 흐르게 하는 김종구의 작품, 영어로는 ‘hi’와 ‘bye’를 동시에 의미하는 ‘안녕’이라는 한국어 형상으로 잠시 몸을 쉬이는 휴게실 의자를 만든 박용석의 ‘안녕의자’ 등이 눈길을 끈다.
반 고흐전 관람티켓을 지참하면 무료이니, 2,3층에서 불멸의 화가와 만난 후 들르면 좋겠다. 전시는 1월27일까지. (02)2124-8934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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