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에 위치한 포스코에 다니는 이기대(48)씨는 2년 전만해도 ‘팀 회식= 괴로운 의무 방어전’이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그는 팀 분위기상 혼자서 회식을 빠지겠다고 하면 곧장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고, 회식 자리에서 술을 사양하면 ‘분위기 망치는 사람’이라는 눈치를 받았다.
회식 다음 날엔 온 종일 술이 덜 깬 채로 ‘취중 근무’를 해야 했고, 평소 1시간이면 할 일을 3시간이 넘도록 마무리 하지 못하는 등 업무에도 막대한 지장이 초래됐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이씨에게 팀 회식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됐다. 회식 자리에서 콜라 등 음료수만 거푸 마셔대도 뭐라고 하는 ‘얄미운 시어머니’도 이제 없다. 지난해 4월부터 이씨가 속한 냉연부에서 자체적으로 도입한 ‘레드 카드제’ 덕분이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땐 ‘레드 카드’를 꺼내고, 아예 회식에 빠지고 싶은 직원은 ‘옐로우 카드’를 내밀면 된다. 이씨는 “레드 카드제가 시행 된 뒤에는 회식 다음날 동료들의 결근율도 부쩍 줄었다”며 “냉연부에만 시행되고 있는 레드 카드제가 포스코 전 부서로 확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음주근무’ 경제손실 연 14조원
‘잘못된 음주문화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고 있다. 기업들이 ‘직원들의 과도한 음주→ 다음날 음주 근무 →업무 효율성 저하와 직원 건강 악화 →회사 손실’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한국음주문화센터가 지난해 직장인 1,219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은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업무 저하를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느낀 숙취로 인한 업무 집중력 저하 시간은 무려 평균 18시간이나 지속됐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4년 발표한 <직장인 음주행태와 기업대책> 보고서에서 ‘한국 직장인 4명 중 1명은 알코올 중독 초기 단계에 해당될 만큼 알코올 의존도가 높고, 업무 현장에서 음주에 따른 경제손실은 연간 14조원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직장인>
■ “술고래 잡아야 회사 산다”
설탕 등을 만드는 CJ제일제당 인천공장에 다니는 김근호(32)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팀 회식이 열리면 소주 두 세 병은 기본이었다. 그러나 현재 김씨의 주량은 소주 반 병을 겨우 마실 정도다. 회사가 경영전략 차원에서 직원들의 음주관리를 하면서부터 주량을 대폭 줄인 것이다.
그는 “술 친구로 지내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술을 끊는 걸 보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며 “술로 몸 망가지고 회사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 모두 손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CJ제일제당 인천공장은 2004년부터 음주관리 경영을 도입했다. 사원들을 대상으로 음주자가진단을 실시해 음주교실에 들어갈 ‘주당’들을 가려내 개개인에 맞는 맞춤형 음주관리법을 교육한다. 한 달에 2차례 점심 시간을 이용해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절주 OX퀴즈 대회’를 여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의 김혜영 보건관리사는 “3년간 꾸준히 관리한 덕분에 직원들의 주 평균 음주 횟수가 3~5번에서 한 번으로 줄었다”며 “알코올 관련 의료비지원도 줄어드는 추세”라고 말했다.
■ 음주 회식엔 법인카드 사용 금지
다른 기업들도 ‘회식자리 폭탄주 안 돌리기’ 등 온갖 묘책을 동원해 직장 내 ‘술고래 잡기’에 한창이다.
삼성전자는 음주의 폐해를 알리는 포스터를 전 사업장에 게시했다. 포스터에는 ‘폭음(소주 1병이나 맥주 4병)이 사람의 뇌신경세포 30억개 가운데 10만개를 한꺼번에 파괴한다’는 섬뜩한 경고가 적혀 있다.
우리은행은 회식을 끝내는 시간을 아예 정했다. 회식 끝낼 시간을 미리 정해 직원들이 일제히 휴대폰 알람에 맞춰놓고, 알람이 울리면 미련없이 술자리를 접고 귀가하는 것이다.
우리은행의 한 직원은 “처음엔 ‘그래도 회식인데’라며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가 쉽게 없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술 잘 마시면 조직에 잘 적응하는 사람, 술 잘 사주면 능력 있는 상사’라는 편견도 점점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SK케미칼 수원공장은 ‘술자리 2차 안가기 운동’을 하고 있으며, 의료기기를 개발해 수출하는 GE헬스코리아는 술 마시는 회식 자리엔 법인카드 사용을 금지하는 등 강력한 절주 프로젝트를 시행 중이다. 국내 한 주류업체에서는 음주운전을 한 직원은 곧바로 파면 대상이 되고, 한 외국계 운송업체는 술을 조금이라도 마신 상태에서는 근무 금지령을 내리며 이를 어기면 사규에 따라 감봉 등 엄격하게 징계한다.
김광기 인제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이제는 직장인 술 문화도 고통(Pain)을 최소화하고 즐거움(Pleasure)을 극대화하?‘쌍P의 조화’를 요구하고 있다”며 “술 말고 다른 방식으로 동료간 친목을 다질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박유민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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