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과병원의 규모가 제법 커지자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 받는 안과전문병원으로 육성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병원 사업에서 얻은 수익을 사회에 되돌리는 차원에서 언젠가는 사람을 가르치고 기르는 육영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희망도 꿈꾸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의외로 쉽고 빨리 찾아왔다. 1978년 늦가을 고향 양촌의 면장님을 비롯한 유지 몇 분이 병원을 찾아온 것이다. 면 소재 중학교의 운영이 매우 어려우니 맡아서 운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직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사양했다. 그런데도 이분들은 계속 찾아와 학교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한번 내려가 현장을 보기로 했다. 70년 개교했다는 학교는 부지 1만3,000여㎡(4,000여평)에 철구조물로 된 2층 교사 1동, 낡은 토담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교실에는 낡은 나무 책걸상뿐이었다. 개교 이래 8년 동안 새로운 투자를 전혀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고향의 학교가 폐쇄 위기에 처한 것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막연하나마 육영사업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이듬해 학교를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위치나 시설로 볼 때 원만한 교육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곳에 학교를 신축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현재 건양중학교가 위치한 남산리 봉소(蜂巢)골이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하천 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큰형님과 김영돈 전 공주사대 학장님은 학교 터로는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적극 추천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앞으로는 필봉(筆峰)이 우뚝 솟아 있고 아래로는 인내(仁川)가 휘감아 흘러, 학생들의 정서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명당이라 할만했다.
학교 이전을 계획하고 80년 4만3,000여㎡(1만3,000여평) 대지에 공사를 시작했다. 내 집을 짓듯 정성을 쏟아 2년 만에 본관과 운동장을 완공하고 교사를 신축했다.시설이 좋다는 학교나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 달려가 품으로 재보고 손끝으로 만지고 와서 공사에 반영했다. 예사로운 물웅덩이 하나도 없애지 않고 연못으로 만들었으며 나무 한그루도 위치와 방향을 꼼꼼히 따져 심었다.
오지의 학교라 도시보다 더 좋은 시설을 갖추고 싶었다. 컬러TV로 시청각 시설을 마련하고 어학실 도서실 기숙사 생활관 수세식화장실 잔디구장 테니스장 등 그 지역에서 가장 현대적 시설을 갖추었다. 학기 초 수업시간에 신입생 하나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냄새 안 나는 변소도 있느냐?”며 신기해 하면서 화장실에 있더라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였다.
80년 학교법인 명칭을 건양학원(建陽學園)으로 변경하면서 학교 이름도 인수중학교에서 양촌중학교로 바꾸었다. 82년에는 양촌고등학교 설립허가를 얻어 4학급 180명을 모집하고 이듬해 봄 첫 입학식을 가졌다. 학교명은 건양중학교ㆍ건양고등학교로 다시 변경했다.
건양학원의 명칭은 공주중학교 은사 민태식(閔泰植) 선생님이 지어준 것이다. 선생님은 8ㆍ15 해방 후 개성국립박물관장을 지낸 동양철학의 대가다. 내가 중학교를 인수한다고 했더니 ‘건양’이 육영기관 이름으로 좋다며 추천했다. ‘건양’은 ‘맑고 밝은 빛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밝은 미래를 일으킬 인재를 많이 양성하라는 것이 선생님의 당부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건학이념을 ‘창조, 정의, 성취’로 삼았다.
농촌인구의 격감 때문에 현재 건양중ㆍ고교는 인수 당시에 비해 교세가 도리어 약해진 상태다. 80년대만 해도 중ㆍ고교를 합쳐 1,800여명의 학생과 100여명의 교직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학생수가 500여명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학교가 부실해져 2세 교육과 고향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면 나도 설 땅이 없다는 각오로 육영사업에 임하고 있다. 학교가 부실해지면 부모님은 물론 조상들께도 욕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내 인생을 거기에 걸고 있다. 건양학원은 올해로 중학 34회, 고교 22회의 졸업생을 냈다.
건양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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