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의심스러웠다. 지난 주 초 진보세력의 원로라는 유명인사 16명이 발표한 반(反)한나라당 후보 단일화 촉구 성명 얘기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세력이 기세등등한 반면 민주개혁을 주도해 온 사람들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세력'이란 필시 한나라당 후보와 한나라당 출신 무소속 후보를 말할 텐데, 그렇다면 현재 두 사람을 지지하는 60% 가까운 국민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신당의 김근태, 노웅래 의원이 엊그제 "국민이 노망 든 게 아닌가" "국민들이 집단최면에 걸린 것은 아닌가"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 뭐가 뭔지 모를 원로들 발언
자신들과 가치가 다른 세력이 과반수 지지를 받는 현실을 도저히 인정 내지는 이해하지 못 하는 단순한 의식구조가 깔려 있다.
성명은 이렇게 이어졌다. "대선이 한 달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는 정교하고 효율적인 정치공학을 통해 최대한의 세력연합을 달성하는 것이 민주개혁세력이 역사 앞에 책임져야 할 임무이다." '효율적인 정치공학'이 어떻게 민주나 개혁과 함께 할 수 있나.
세간에서는 통합신당을 도로 열린당이라고들 한다. 분당, 창당, 탈당, 다시 창당…. 이 모든 과정이 우리가 고등학교까지 금과옥조로 배운 민주주의 정당 정치의 틀을 근본에서부터 거부하는 짓거리였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장난을 잘 치면 바보 같은 유권자가 표를 많이 줘서 대권을 잡는다는 한심한 얘기다.
백낙청, 함세웅, 고은, 한승헌, 황석영 같은 쟁쟁한 이름들이 어쩌다 이런 비교육적인 발언을 대놓고 하게 됐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범여권의 진정한 문제는 이들이 지적한 "패배주의"가 아니라 진짜 문제가 뭔지 진짜 모르는 맹목이다.
백 교수 등의 성명이 발표된 다음날 '건국 60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라는 단체에서도 기자회견을 했다. 명시적으로 한나라당 후보를 민 자리는 아니지만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주축이어서 보수 세력 결집을 촉구하는 선언으로 해석되는 것은 당연했다.
"건국 60년사는 대한민국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말하듯 결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가난과 절망을 풍요와 희망으로 대치하고 독재와 불의를 정의와 민주주의로 극복해나간 성공의 역사다." 뭐 전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다.
김정일도 대한민국을 실패의 역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강영훈 전 국무총리,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 같은 쟁쟁한 인사들이 당연한 얘기를 자못 비장한 어투로 하는 이유는 뭘까? "대한민국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미워서?
그런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있었으니까 부정선거도 한 것 아닌가. 살아생전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김구)을 어떻게 대한민국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 이런 나이브한 인식을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대한민국을 깎아내리고 헐뜯으려는 사람들일까? 보수 세력의 결집을 위해서라도 허상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자라나는 학생들 교육에 안 좋고, 보수 후보 당선에도 당연히 도움이 안 된다.
● 국민은 지금 희망을 원한다
보수나 진보, 좌파나 우파, 범여권과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지금 후보들의 문제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를 찍으려고 해도 못마땅하고, 누구도 안 찍을 수도 없는 게 지금 국민들의 답답한 심정이다.
그러니 조언이라고 보기에는 하나마나 한 소리, 훈수라고 보기에는 뭘 잘 모르는 얘기, 촉구로 해석하기에는 너무 비장해서 오히려 우스워지는 발언은 이제 그만들 하시는 게 좋겠다. 지금은 원로로 통하는 분들의 이름에 한때나마 가슴 떨려 했던 사람으로서 간곡히 말씀 드린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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