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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3) 브뤼셀 - 언어의 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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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3) 브뤼셀 - 언어의 전장

입력
2007.11.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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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P.는 오이펜의 라디오방송 <벨기쳐 룬트풍트> 기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셋 아래였으나, 일고여덟 아래라 해도 곧이들을 만큼 동안(童顔)이었다. 오이펜은 프랑스어권인 왈로니 지역 리에주도(道)에 속해 있지만, 독일어를 쓰는 도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분리돼 주민투표를 거쳐 벨기에 영토가 됐다.

오이펜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왔으니, 귄터의 모어도 당연히 독일어였다. 제 조국의 양대 언어인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그는 썩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특히 네덜란드어는 영 자신이 없었는지, 네덜란드나 플랑드르 출신의 ‘유럽의 기자들’ 동료들과도 프랑스어나 영어나 독일어로 얘기를 나눴다.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의 근친 관계를 생각하면, 그가 프랑스어보다 네덜란드어에 더 서툴다는 것이 뜻밖이기도 했다. 자라면서 네덜란드어보다 프랑스어에 노출될 기회가 훨씬 더 많아 그리 됐을 것이다.

“네덜란드어는 나한테 귀로 듣는 언어지 입밖에 내는 언어는 아냐.” 플랑드르 출신의 동포들과도 ‘외국어’로 얘기하는 것을 신기해하는 나에게 귄터가 한 말이다. 알아듣는 게 전부라는 것이다. “브뤼셀에선, 문득 외국에 온 느낌이 들 때가 있어. 국경 너머 아헨에 가면, 여전히 고향 같고.” 아헨은 오이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 도시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주민투표에서 독일사람이 아니라 벨기에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선조들을 귄터는 원망하고 있을까? “그렇진 않아. 독일어엔 애착이 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는 별로야. 힘센 나라에 애착이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미국이 훨씬 낫지.”

신 포도의 심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귄터는 독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벨기에라는 나라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제 나라의 수도에서 문득 외국인 느낌을 받는 사람이 조국에 애착을 지니긴 어려울 것이다. 그는, 약간 스스러워하며, 자신이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말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벨기에인’이라는 처지가 그를 코스모폴리탄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브뤼셀은 어때?” 브뤼셀에 처음 가게 됐을 때 내가 귄터에게 물었다. “예쁜 도신데, 언어의 전쟁터지.” 그가 받았다. 귄터는 제 나라의 수도를 언어의 전쟁터라 불렀다. 그가 썩 유창하게는 하지 못하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사이의 전쟁터라는 뜻이었다.

파리나 안트베르펜에서 하루나들이로 대여섯 번 다녀왔을 뿐 그 도시에 오래 머물러보지 못한 나는 지금도 ‘브뤼셀의 언어 전쟁’이라는 말을 실감하지는 못하겠으나, 기차역 이름부터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 나란히 적어놓은 게 신기하긴 했다.

예컨대 프랑스 쪽에서 네덜란드 쪽으로 가는 기차가 브뤼셀에 들어서며 처음 서는 남역(南驛)엔 ‘Bruxelles-Midi/ Brussel-Zuid’라는 표지가 보이고, 그 역에 딸린 지하철역엔 ‘Gare du Midi/ Zuidstation’라는 표지가 있다. 거리 이름(‘Hoogstraat/Rue Haute’), 광장 이름(‘Grote Markt/ Gand'Place'), 강 이름(‘Zenne/Senne’)도 마찬가지였다. 브뤼셀은 대역(對譯)의 공간이었다. 본래는 네덜란드어-프랑스어 대역이었으나, 이젠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처럼 보인다.

■ 공식적으로 대등한 2개 언어 병용

브뤼셀은 플랑드르 지역 안에 있지만, 네덜란드어(플라망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쓴다. 방금 예로 든 표지판들만이 아니라, 이 도시의 모든 공적 텍스트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두 가지로 표기된다.

두 언어 가운데 하나로 표기된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두 언어로 병기된다는 말이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이 도시에서 대등하다는 뜻이다. 브뤼셀은 언어사회학자들이 바일링구얼리즘(2개 언어 병용)이라 부르는 현상을 실현하고 있는 드문 도시다.

어떤 공동체가 두 개 언어를 쓰는 현상에는 바일링구얼리즘말고 다이글로시아가 있다. 다이글로시아는 어떤 공동체가 두루 쓰는 두 언어가 그 사회적 기능과 공적 위세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를 가리킨다.

2개 언어 병용은 대부분 다이글로시아 형태로 실현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사용되지만, 사회적 기능과 공적 위세에서 영어는 스페인어를 크게 압도한다.

다이글로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이 주류언어를 모어로 익혔을 때는 다른 언어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되지만, 그가 비주류 언어를 모어로 익혔을 땐 주류언어를 배워야 한다. 예컨대 영어가 모어인 캘리포니아 사람은 굳이 스페인어를 배울 필요가 없지만, 스페인어가 모어인 캘리포니아 사람은 반드시 영어를 배워야 한다.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사회생활의 여러 부문에서 적잖은 불이익을 받는다.

그런데 브뤼셀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대등하게 사용되는 바일링구얼 도시다. 그래서 프랑스어가 모어인 브뤼셀 시민이든 네덜란드어가 모어인 브뤼셀 시민이든 굳이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한 통계에 따르면, 브뤼셀 시민 가운데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둘 다 모어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하나 남짓밖에 안 된다. 제2언어를 배울 때 프랑스어 화자가 꼭 네덜란드어를 고른다거나 네덜란드어 화자가 꼭 프랑스어를 고르는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 한 언어만 알아도 브뤼셀에서 사는 데 큰 불편함이 없다는 뜻이겠다.

■ 실제로는 프랑스어의 위세가 더 강해

그러나 두 언어가 대등하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로는 프랑스어의 위세가 더 크다. 프랑스어만을 모어로 삼고 있는 브뤼셀 시민이 절반을 훌쩍 넘기 때문이다.

이것은 브뤼셀 안의 플라망어 공동체에만이 아니라 브뤼셀 바깥의 플랑드르 사람 일반에게도 씁쓸한 일일 것이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브뤼셀 시민 대다수는 네덜란드어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랑드르 사람들은 브뤼셀을 자신들의 ‘잃어버린 수도’라고 애도하곤 한다.

■ 18세기까지는 대다수가 네덜란드어 사용

나폴레옹 전쟁 시기 브뤼셀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네덜란드어의 우위는 19세기 내내 잦아들었다. 프랑스어의 문화적 정치적 위세에 이끌려 네덜란드어 화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식들의 모어를 프랑스어 쪽으로 바꾸어 왔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플랑드르 지방의 네덜란드어 방언 가운데 어느 쪽을 표준어로 삼아야 할지를 두고 플랑드르 안에서 벌어진 골치 아픈 논쟁도 브뤼셀의 네덜란드어 화자들로 하여금 프랑스어 쪽으로 투항하도록 부추겼다.

그래서 오늘날 네덜란드어가 모어인 브뤼셀 시민은 어설프게라도 프랑스어를 이해하지만, 프랑스어가 모어인 브뤼셀 시민 가운덴 네덜란드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벨기에는 강대국이 아니다. 그러니 브뤼셀은 강대국의 수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브뤼셀은 유럽의 수도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서부-중부유럽의 수도라 할 수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지금의 경제 차원을 넘어 정치 통합을 이룬다면, 브뤼셀은 명실상부하게 유럽의 수도가 될 것이다.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와 베넬룩스 세 나라가 1950년대에 유럽경제공동체를 출범시켰을 때 그 집행부가 브뤼셀에 들어선 것은 자연스러웠다. 적어도 파리나 본이나 로마를 고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강대국의 수도 어디도 또 다른 강대국으로선 마땅치 않았을 테니 말이다. (혹시 언젠가, 느슨하게라도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라는 게 생긴다면, 평양이 아시아의 브뤼셀 구실을 할 수는 없을까? 몽상이지만,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작은 파리’라는 별명에서도 드러나듯, 브뤼셀은 플랑드르 안에 있으면서도 네덜란드보다도 프랑스 쪽 분위기가 짙다. ‘진짜’ 플랑드르 사람들로서는 그것도 원통할 것이다. 그러나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몇몇 도시처럼, 브뤼셀도 시청 앞 광장 이름이 흐로터 마르크트(프랑스어로는 그랑 플라스)다. 브뤼셀이 플랑드르의 도시라는 한 증거다.

■ ‘꽃의 광장’ 시청광장, 빅토르 위고가 극찬

나폴레옹3세를 피해서 이 도시로 망명해 잠시 살았던 빅토르 위고는 그랑 플라스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우겼다. 그것은 망명자의 애정이 담긴 과장일 테지만, 브뤼셀의 시청광장이 내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에서 본 시청광장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던 건 사실이다. 이 광장은 화훼시장을 품은 꽃의 광장이기도 하다.

브뤼셀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오줌 누는 소년’(마네켄피스)이 이 광장 가두리에 있다. 어느 여름날 내가 브뤼셀로 안내한 한국인 친구는 동상이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작다며 실망을 표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규모가 컸다면, 외설적이라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브뤼셀에서 역사를 마주하고 싶으면 시내에 있지 말고 남쪽 교외로 나가는 게 좋다. 세계의 운명을, 적어도 유럽의 운명을 뒤바꾼 워털루 언덕이 멀지 않다. 1815년 핏물과 시신으로 검붉었을 이 언덕은 지금 푸른빛으로 싱싱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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