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유가가 국제원유 시장을 둘러싼 역학 관계에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오일 쇼크 때마다 세계 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사우디 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들이 이번 고유가 시대를 맞아 가격완충 역할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브라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들이 신흥 에너지 파워로 부상하며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상 유례가 드문 달러화 약세, 에너지 자원의 무기화 등이 빚어낸 신 풍속도다.
올해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은 원유를 팔아 6,580억 달러(약 6,000억원)를 벌어 들였다. 10년 전보다 무려 5배 늘어났지만 문제는 이 돈이 달러화라는 점이다. 달러화가 추락하는 만큼 고스란히 손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페그제(달러 연동 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중동 산유국들의 피해는 막대하다. 이들 국가는 국제 시장에서 구매력이 감소하고 유럽 등 미국 이외 지역과의 교역에서의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중동 산유국들이 페그제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기업과 부동산에 막대한 투자를 해온 이들 국가들이 달러화를 다른 통화로 대체하면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이는 동반 부실로 이어진다. 18일 OPEC 정상회담에서 사우디 재무장관 알 파이잘 왕자가 “달러화 약세가 정상회의 선언문에 포함되면 달러는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이런 우려를 반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브라질,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등 남미 국가들은 에너지 자원의 무기화를 십분 활용하면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브라질은 최근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OPEC의 14번째 회원국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브라질 상파울루 해안 인근에서 발견된 투피 심해 유전은 추정 매장량이 60억~80억 배럴로 브라질 기존 매장량의 절반에 이른다. 이에 따라 석유 매장량 순위가 세계 17위에서 13위로 뛰어 올랐다. 미국은 좌파 성향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의 OPEC 가입 후의 행보에 벌써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좌파 정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석유 자원의 무기화를 추진하고 있다.
OPEC 회원국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현재의 유가는 1970년대 기준으로 33달러에 불과하다”면서 유가 인상을 주장해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미 성향의 OPEC 회원국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1992년 OPEC을 탈퇴했던 에콰도르의 코레아 대통령은 최근 OPEC 정상회담에 참석하면서 15년 만에 이 기구에 공식 복귀했다. 지난해 집권한 코레아 대통령은 최근 자국내 외국 석유 기업들이 거둔 부가적 이익을 환수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민주 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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