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과병원은 365일 쉬는 날 없이 진료한다. 설날, 추석에도 오후1시까지는 환자를 본다. 모든 직원이 이렇게 열심히 일해 병원은 나날이 번창했다. 영등포세무서에 내가 직종별 최고 납세자로 기록될 만큼 소득도 늘었다.
돌아보면 지금이 있기까지 조상의 가르침이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광산김씨 경력공파 38세손으로 유교의 법도 아래 자랐으며 집안 내력의 중요성을 누누이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고향 양촌에서 한학자로 알려졌으며 내가 자랄 때도 아버님의 뜻에 누구 하나 반기를 들지 않는 철저한 가부장제 가정이었다.식사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한 상을 받았고 우리 형제는 어머니와 딴 상을 차렸다. 지금 세상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논산은 조선 기호학파의 산실로 사계 김장생 선생을 모신 돈암서원과 윤황ㆍ윤증 선생을 모신 노강서원이 있는데 두 곳 모두 임금이 편액과 서적을 하사한 사액서원이어서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액서원은 오늘날로 치면 국가가 인정하는 사립대학인데 내가 논산에 대학을 세운 것도 조상들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음덕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조상 모시는 일이나 문중 행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요즘은 문중이니, 족보니 하는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20세기 최고의 석학 토인비가 한국의 대가족제도와 효(孝) 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노후에 외롭다는 말을 되풀이하다 아들 집에 합류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되짚을 필요가 있다.
나는 1984년부터 92년까지 4대(제19~22대)에 걸쳐 광산김씨 대종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인화와 조직 확대에 역점을 두었고 지방 종친회 총회에는 가능하면 참석했다.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 미국이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은 물론 중국 옌볜(延邊)과 유럽 종친회도 결성했다.
그 가운데 옌볜 종친회가 기억에 남는다. 90년 우리나라가 중국과 국교를 맺자마자 그곳으로 날아갔다. 이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당시는 선입견 때문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이었다. 그곳 일가들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과 미화 3,000 달러를 준비해 갔는데 60~70여 명의 일가가 플래카드를 들고 비행장에 마중 나왔다.
백두산 등반의 기회도 가졌다. 당시만 해도 백두산은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묵었던 호텔도 사회주의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옌볜까지 비행기로 바로 갈 수 있지만 그때는 홍콩과 선양(瀋陽)을 거쳤다. 내년에는 북한을 통과해 백두산으로 직항한다니 세상이 그만큼 달라진 것을 새삼 느낀다.
8년간 대종회를 이끌면서 광산회관을 건립하고 <광산김씨사> 를 발간했다. 문중 어른이신 김장생, 김 집 선생의 예학을 가르치는 강연회도 열었다. 그 연장선에서 건양대에 예학교육연구원을 설립했다. 광산김씨사>
나는 또 서포(西浦) 김만중 기념사업회장도 맡았다. 서포는 조선의 문신이자 문학가로 <구운몽(九雲夢)> 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를 집필했다. 대전 유성구 전민동에는 서포의 아버지인 충정공의 묘소가 있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를 드나들며 국사를 논하고 학문을 닦았던 흔적도 있다. 이를 기리어 2001년부터 매년 대전에서 서포선생 기념 학술대회와 효 백일장 등을 개최하고 있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구운몽(九雲夢)>
건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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