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선에서 보수세력을 대표한 이들 가운데 한나라당의 이명박씨가 가장 흠 많은 후보라면, 통합신당의 정동영씨는 중도우파세력을 대표했던 이들 가운데 가장 무기력한 후보다. 정동영씨의 무기력은 정 후보 자신의 정치행로에서 온 것이기도 하고, 소위 범여권의 지난 5년 행로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힘없는 사람들의 신임 위에 세워져 바로 그 지지자들의 신임을 저버려온 정권에서 누릴 만큼 누렸으니, 옛 지지자들이 그를 다시 신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 진보적 유권자들의 해방공간
통합신당 경선에서 정동영씨의 경쟁자들이 비난했듯 그가 '배신자'라면, 그 배신의 본질은 옛 민주당에 대한 배신도, 손수 만든 열린우리당에 대한 배신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배신도 아니었다.
본질은 지지자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정동영씨는 둘레의 정치세력이나 개인들과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한통속이 돼, 제게 권력을 위임한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그런 배신행위가, 우리 사회의 힘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패한 부자 정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때그때의 상황논리에 따라 말과 행동을 자유자재로 바꿨던 그 날렵한 정치행로가 아니더라도, 정동영씨에게는 정치적 자질과 자산이 앞서 그의 자리에 섰던 선배 정치인들보다 크게 부족하다. 그에게는 김대중씨가 지녔던 카리스마나 넓은 시야도 없고, 노무현씨가 지녔던 단심(丹心)의 이미지도 없다.
노무현씨의 '단심'은 그의 집권 이후 연기로 드러났지만, 그것은 노무현씨가 그만큼 뛰어난 대중정치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의 진심을 의심할 수 없었을 만큼, 노무현씨의 표정은 진지했고 말투는 곡진했다. 이 연기력에서 정동영씨는 족탈불급이다.
깔끔한 외모와 매끄러운 언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왠지 그 자신도 제 말을 믿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들이 꼭 허황해서만은 아니다.
소위 범여권과 정동영씨 개인의 이런 취약점은, 1987년 이후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시달렸던 진보 유권자들에게 이번 대선이 해방공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정동영씨 개인이든 그가 대표하는 정치세력이든, 복지와 사회연대라는 진보적 가치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은 이제 분명하다. 또 정동영씨와 그의 친구들이 한나라당에 견주어서는 덜 부패했고 총자본에 덜 친화적이라 하더라도, 이 중도우파 세력의 재집권 가능성은 역대 어느 대선 때보다 낮다.
설령 BBK 스캔들로 이명박씨가 낙마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니, 소위 민주세력 분열이니 사표니 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 없이 진보세력에 표를 줄 수 있게 된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진보정치세력을 대표한다는 민주노동당의 행태를 보면 그런 결정도 쉽지만은 않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으며 일궈낸 희망은 이제 아스라하다.
의원 개개인의 성실한 의정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고질적 정파 싸움과 민주주의 문화의 부재는 이 정당에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었다.
게다가, 당내 경선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권영길 후보는 소위 '코리아연방공화국'론을 계속 치켜듦으로써 북한 체제에 비판적인 상식적 진보 유권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 재벌-관료 동맹이 싫다면
그러나 선거가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한 세력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라는 점을 진보 유권자들이 충분히 이해한다면, 권영길 후보와 민노당에도 희망은 있다.
권영길씨와 민노당은 민족지상주의만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민주의를 대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민노당은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삼성재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는 제도권 정치세력이다.
재벌-관료 동맹의 악취가 견디기 힘든 유권자라면, 이번 대선과 내년 총선에서 미흡하나마 민노당이라는 대안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다. 그것은 염불보다 잿밥에만 마음을 쏟았던 중도우파 '개혁' 세력에게 교훈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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