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행위에 대한 엄정한 대처, 선의의 학생 보호, 사회문제 최소화, 유사사태 방지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 경기도 교육감이 김포외고 입시문제 유출과 관련해 합격통지를 받았던 중학생 54명에게 불합격을 선언하면서 한 말이다. 나에겐 이렇게 들린다. '우선 저희들이 살아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줘야 하고, 무엇보다 국민 눈총을 빨리 벗어야 합니다. 어린 학생 여러분 미안하지만 살신성인의 미덕을 발휘해 주세요.'
● 교육청 졸속 처리로 학생만 피해
사설학원이 돈벌이에 신경 쓰는 걸 탓할 순 없다. 그 과정에서 불법과 탈법이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하면 된다. 하지만 학교와 교육청, 나아가 교육부까지 사건 무마에만 혈안이 되어(사회문제 최소화?), 옥석을 가리는 노력도 없이(선의의 학생 보호?), 일벌백계 식(재발 방지?)의 잣대를 원칙이라 우겨선 안 된다.
교육청은 며칠 뒤 '문제의 학원에 등록했던 학생이 더 있었다'며 9명을 찾아 합격을 취소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려 들었다. 국민들도 '이명박과 BBK' 혹은 '삼성과 떡값' 등에 주목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잦아들고 있다. 이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우선 새로 색출했다는 9명을 보자. 교육청은 문제가 유출된 기간에 그 학원에 다닌 학생을 '부정행위 가담자'로 간주했다. 부정행위의 기본인 고의나 과실의 증거가 없음은 물론 그 기간에 그 학원에 없었던 학생마저 포함돼 있다.
교육청은 "학원 서류를 기준으로 했으므로 그때 학원에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들이 유출문제가 공개됐던 버스에 탔는지도 알 수 없다. 억울할 수 있겠지만 나중에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보자"고 했다.
나는 이들이 교육자는커녕 최소한의 직업인이라고도 믿을 수 없다. 모두 버스에 탔던 것으로 간주한 뒤 '타지 않은 알리바이를 대라'며 추궁하고, '유출문제를 봤는지 자수하여 광명 찾으라, 고교 진학을 못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니 기가 막힌다.
때늦은 얘기일 수 있으나 당초 유출문제를 접했다는 54명도 그렇다. 문제를 알려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탔을 수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교통편의를 위해 탔을 수도 있다.
시험문제인 줄 알고 열심히 보았을 수도 있고, 흔한 족집게 문제 중 일부로 여겨 흘렸을 수도 있다. 일부 '진짜 부정행위자'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주변 모두를 부정행위자로 간주해 뭉뚱그려 도려내자는 짓이다. 무슨 암 수술이나 조류독감 방역도 아니고, 어린 학생들의 인생을 그렇게 처리해선 안 된다.
지금도 늦지 않은 두 가지 방안이 있다고 본다. 전면적인 재시험을 치르거나, 문제가 있어보이는 63(54+9)명의 합격 발표를 일단 인정하고 그만큼 추가로 선발한 뒤 부정행위 여부를 법원의 판결에 맡기는 것이다(아직도 수사는 진행 중). 해당 학교 경쟁률이 9~10대 1이었기에 교육청이 밝힌 일부 재시험(부정행위자와 불합격자 대상)이나 전면 재시험이나 시간적ㆍ행정적 차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탈없는 합격자들의 반발이 우려되지만 공정성이란 시험의 대원칙을 지킬 수 있다.
추가시험의 경우 학교의 정원문제 등이 예상되지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학교와 교육당국이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선의의 피해자를 최소화할 수 있다.
● 엄한 문책과 제도개선 이어져야
다행히 우리는 전면 재시험과 추가시험 후 법원판결이라는 전례를 갖고 있다. 1974년 대구 일부 지역에서 고교입시 정답에 암호를 표시해 일부 학생들만 이익을 보았을 때 시험의 공정성이라는 대원칙에 따라 전면 재시험이 실시됐다.
1964년 서울 중학입시의 '무즙사건'(중복 답안) 때 선의의 피해자를 최소화한다는 원칙으로 일시 정원을 늘린 뒤 법원의 판결에 따라 처리했다.
우리의 입시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이 두 사건이 결국 학생들의 피해를 줄이고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했던 것은 당시 해당 학교와 교육청, 교육 당국이 철저히 책임감을 통감하는 자세를 보인 뒤 제도개편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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