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인 2004년 10월28일 오전, 기자는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브리핑실에 있었다. 안병영 당시 교육부총리가 2008학년도 이후 대입제도 개선안을 발표하는 자리를 지켰다.
입시 문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우리 학부모들의 눈과 귀가 그에게 쏠렸음은 물론이다. 개선안의 하이라이트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등급제였다. 2007학년도 입시까지만 수능 성적에 점수를 표기하고, 이후 입시부터는 1~9등급의 등급제로 전환한다는 내용이다.
안 부총리(그는 퇴임 후 연세대 교수로 복직했다)가 설명한 등급제 도입 논리는 이런 식이었다. "1~2점을 더 따기 위한 점수 경쟁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사교육의 원인이기도 한) 수능의 역할을 축소하는 대안이기도 하지요." 대입 전형의 핵심 요소인 수능의 비중을 떨어뜨려 수험생들의 과중한 학습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 안 부총리의 표정은 왠지 굳어 있었다. 옅은 미소를 보이긴 했지만, 자신감이 없었고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오랜 교수 생활과 한 차례 교육부 장관을 지내면서 '관록'이 쌓인 그가 이런 운신을 하게 된 이유는 한참 뒤에 알게 됐다.
이듬 해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가 내놓은 '백서'에는 수능 등급제 결정 과정의 뒷얘기가 녹아 있었다. 새 입시 정책을 내놓는 날, 교육부총리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청와대와의 갈등 부분을 암시하는 대목이 특히 눈에 들어 왔다.
혁신위가 제시한 등급은 1~9등급이었고, 1등급 비율은 4%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백서는 "노 대통령은 9등급이 아닌 7등급을, 9등급제를 하더라도 1등급 비율은 7%를 희망했다"고 적고 있다.
교육전문가인 안 부총리에게 노 대통령의 생각은 '교육 아마추어'의 단견으로 여겨졌을 법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안 부총리는 변별력 저하를 이유로 (노 대통령 의견에)반대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등급제 확정 과정에서 안 부총리와 청와대, 혁신위 등이 빚었을 마찰의 수위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난 15일 새 대입제도가 처음 적용된 2008학년도 수능시험이 치러졌다. 등급제가 상대평가인 만큼 수험생의 영역별 등급은 수능 성적표가 전달되는 12월12일이 돼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등급제 파동'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가채점 결과, 등급제의 '모순'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탓이다.
2문제만 틀려도 1등급을 놓치는 영역이 있다. 1점 차이로 2등급이 될 가능성도 제기돼 해당 수험생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영역별 총점에서는 앞선 수험생이 등급에서는 뒤지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목도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주요 대학들은 등급별로 가중치를 주기로 해 '등급제'는 수험생들에게 공포나 마찬가지다. "1등과 2만3,000등을 어떻게 같은 등급으로 처리할 수 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수능 응시생 58만여명에 1등급 비율 4%를 곱해 나온 수치의 맹점에 대한 비판이다.
교육부는 등급제 평가에 말문을 닫았다. 어쩌면 안 전 부총리의 당시 태도는 등급제 후유증의 예고편일 수 있다. 만약 노 대통령 구상대로 1등급 비율을 7%로 했으면 어떤 결과가 빚어 졌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김신일 현 교육부총리가 수험생들에게 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김진각 사회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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