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당 정치가 확립된 미국 대선에서 무소속 후보가 뜨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1992년 대선 때 로스 페로는 공화당 현직 대통령 부시와 민주당의 클린턴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19%를 득표, 1912년 테오도어 루스벨트 이후 기록을 남겼다.
페로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2년 정보처리업체를 창업, 20년 만에 GM에 24억 달러에 넘긴 IT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또 1979년 이란 혁명 와중에 현지 주재원들이 억류되자 특수부대 출신 용병을 조직해 구출, 영웅에 환호하는 사회의 대중스타 면모를 지녔다.
그는 애국주의와 사회기강 확립을 외치는 등 보수 깃발을 내걸면서도 낙태 자유화와 아웃소싱 중단 등 진보적 공약으로 대중에 어필했다.
● 악담과 궤변의 개그콘서트
그러나 페로 돌풍의 바탕은 부시의 인기가 추락하고, 클린턴은 갖가지 스캔들에 시달린 상황이었다. 페로는 누적 재정적자의 재앙에서 나라를 살려내 바로 세우겠다는 출사표로 양당 후보에 실망한 유권자의 이목을 끌었다.
이를 간파한 시사주간 <타임> 은 페로를 표지 인물로 다뤘다. 제목은 <고도를 기다리며> 에 빗댄 <페로를 기다리며> . 이를 계기로 한때 지지율이 39%까지 치솟으며 부시와 클린턴을 제쳐 대이변을 기록할 뻔했다. 페로를> 고도를> 타임>
"대한민국을 살리겠다"며 대선에 뛰어든 이회창 씨를 페로에 비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수 이념을 앞세워 무소속 출마를 감행한 점이 닮았으나 개인적 면모는 판이하다.
그런데도 페로 돌풍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정치권과 언론이 자신들의 이념과 행적, 처지는 아랑곳 없이 이 전 총재를 욕하고 헐뜯는 것이 우스워서다.
청와대가 정색하고 욕한 것부터 망측하다. 두 차례 패배와 도덕적 심판을 무릅쓴 것은 국민을 모욕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권 경쟁에서 승리해 집권하고서도 스스로 보수가 다시 득세하는 빌미를 제공한 처지에서 할 말은 아니다. 대선자금 비리를 넌지시 일깨운 것도 제 얼굴에 침뱉기다.
대통합민주신당이 "수구꼴통 보수의 치욕스러운 귀환"이라고 경계심을 드러낸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명박 대세론은 끝났다"고 덧붙인 자가당착은 비웃고 싶다. 정체 불명, 의식 불명인 몰골을 새삼 드러냈다.
그밖에 민주당 이인제 후보가 "나보다 더 나쁘다"고 '대선 어록' 에 오를 말을 남긴 것은 애교로 여긴다. 한나라당이 호떡 집에 불 난 것처럼 난리 치고, 더러 아버지처럼 섬기던 이들까지 악담을 퍼붓는 모습도 정치판 생리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과 학자들이 '경선 불복' 등 해괴한 논리를 동원, '이회창 죽이기'에 동참하는 것은 꼴사납다.
정계은퇴 약속을 깬 정치인은 DJ 뿐 아니라 한나라당 지도부에도 여럿 있다. 대선자금 책임은 노무현 대통령도 짊어지고 있지만 5년 임기를 다 채웠다. 두 차례 선거 패배 전력은 DJ의 '4수(修)'에 못 미친다.
권영길 민노당 후보도 3번째 도전이다. 72세 나이를 흠잡고 '노욕'을 나무라지만, DJ와 고 정주영씨보다 젊은데다 원래 '권력욕'은 '권력의지'와 동전의 앞뒤 같은 관계다. 그게 없으면 정치 지도자로 결격이다.
● 후보 각자 '개인기'로 승부해야
이회창씨의 출마를 반기거나, 그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가 우리 정치에서 드물게 훌륭한 자산을 갖고서도 편협한 보수의 틀에 안주, 진보의 거센 물결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거듭 비판했다.
그러나 뜻밖의 재출마에 관심 갖는 것은 5년 세월을 와신상담하면서 어떤 각성과 지혜를 얻었는지 궁금해서다. 국민도 결국 출마에 대한 찬반과는 별도로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을 다시 냉정하게 저울질할 것이다.
이 전 총재는 분명 국민을 위한 선택의 폭을 넓혔다. 또 출마 연설에서 훨씬 나아진 면모를 보였다. 이런 평가를 시비할 게 아니라, 국민 앞에서 열심히 비전과 자질을 다투는 것이 후보들이 할 일이다. 언론과 국민도 거기에 주목해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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