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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2> 브뤼헤- 플랑드르의 스키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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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2> 브뤼헤- 플랑드르의 스키야키

입력
2007.11.22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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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도 스키야키를 먹어본 기억이 어렴풋이 나긴 하지만, 이 일본식 쇠고기 전골에 맛을 들인 것은 30대 후반 파리에 살 때다. 그 시절엔, 일식집을 찾는 것이 생선회나 초밥에 입이 당겨서라기보다 스키야키가 먹기 싶어서였다.

일식집이라 해서 차림표에 꼭 스키야키를 올려놓는 법은 없었으므로, 내가 파리에서 들르는 일식집은 제한돼 있었다. 그 일식집 가운데 하나가 생미셸 구역 먹자골목 안의 야키자포였다.

야키자포의 스키야키는, 적어도 내 입에는, 파리 최고였다. 게다가 값도 만만했다. 그 집에선 스키야키든 생선회든 초밥이든 야키도리든, 15구나 16구의 그럴싸한 일식집에 견주면 거의 반값에 먹을 수 있었다.

식대가 헐하다는 점과 관련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손님들 가운데 그럴싸한 차림의 일본인 관광객은 찾기 어려웠다. 맛있고 값싸다는 점말고도, 그 집 스키야키엔 결정적 장점이 또 하나 있었다. 스키야키를 파는 집에서도 보통은 2인분 이상만 주문을 받았던 데 비해, 야키자포는 1인용 철냄비와 일회용 연료를 갖춰놓고 있었다.

하나의 단점은 종업원들이 그리 살갑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스페인어가 모국어인(어느 나라 출신인지는 모르겠다) 청년 하나는 내게 단골 대접을 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얼굴을 익힌 지 한참 지나서도 늘 데면데면 무뚝뚝인데다가, 정신을 어디다 놓고 있는지 주문을 떼어먹기 일쑤였다. 거기 더해, 파리의 식당 웨이터 기준으로도 행동이 느려 터졌다.

그 집 스키야키가 내 입에 그리 맞지만 않았더라도, 그 친구와 주인을 불러놓고 한 마디 따끔하게 건넨 뒤 출입을 접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혀는 도저히 야키자포의 스키야키를 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거의 중독 수준이었다. 그래서 파리에 사는 동안, 나는 ‘굴욕적으로’ 야키자포를 드나들었다. 저민 쇠고기 한 점을 보글보글 끓는 육수에 익혀 입에 넣으면, 조금 전까지의 굴욕감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사케나 맥주를 한 모금 곁들이면,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바로 천국이었다.

유럽의 다른 도시에 가서도, 주머니 사정이 영 곤궁하지 않으면 나는 일식집을 찾아 스키야키를 먹곤 했다. 야키자포의 것보다 더 맛있는 스키야키를 파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야키자포만큼 싸게 파는 곳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부활절 늦은 오후 벨기에 브뤼헤의 한 일식집에서, 나는 거의 야키자포의 것만큼이나 입에 맞는 스키야키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 놀랍지 않게도, 값은 야키자포의 두 배가 넘었다.

딱 한 번 가본 집이었는데,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그 때 나는 미라벨 L.이라는 여자(카렌을 통해 안트베르펜에서 알게 된 친구다)와 브뤼헤에 하루나들이를 온 참이었다. 그 일식집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게 더 아쉬운 것이, 그 집에서 좀 별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저녁시간으로는 좀 일러서 그랬는지, 식당에는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한눈에도 아시아인의 피가 섞인 듯 보이는 미모의 웨이트리스가 우리 테이블을 맡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유별났다.

쇠고기와 육수와 이런저런 야채와 달걀 따위로 테이블을 채워놓았으면 가서 다른 일을 보는 것이 당연하겠건만, 이 친구는 푸성귀와 표고버섯을 육수에 넣어주고 나서도 우리 테이블 옆에 조신한 자세로 계속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젓가락으로 쇠고기를 한 점 들어 육수에 익힌 뒤 내 입에 넣어주었다.

■ 너무 친절해서 당황했던 스키야키 식당

나는 당황했지만, 얼떨결에 이 이상한 봉사를 받고 말았다. 그 아가씨는 이어서 미라벨에게도 마찬가지로 쇠고기를 한 점 먹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게, 이를테면 와인 시음처럼, 한 번으로 끝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웨이트리스는 미라벨에게 한 차례의 봉사를 마친 뒤 또 다시 내 입에 쇠고기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렇게 옆에 서서 먹여줄 심산인 게 분명했다. 나는 그 친구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상냥하게, 우리가 직접 먹겠으니 그런 수고를 아끼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약간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죄송하다고 말한 뒤, 그게 ‘일본식’이어서 그랬다고 변명하고는 물러갔다.

‘일본식’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녀가 일본계 혼혈인이겠거니 짐작했다. 묻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저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일본 음식이어서, 그녀가 ‘일본식’ 운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일본식’이라는 말을 미라벨도 놓치지 않았다. 웨이트리스가 우리 테이블을 떠난 뒤 미라벨이 내게 물었다. “일본에서는 웨이트리스가 손님한테 음식을 먹여줘?” 열흘 머물러본 게 일본 경험의 전부인 내가 그녀에게 권위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일본에서 스키야키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파리의 라틴계 청년이 너무 무뚝뚝했다면, 브嗔裏?‘반(半)일본인’ 아가씨는 너무 친절했다. 너무 무뚝뚝한 것과 너무 친절한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사람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지 잘 모르겠다.

즈웨인만(灣) 어귀의 도시 브뤼헤는 운하로 둘러싸여 있다. 이 도시는 12세기부터 몇 백 년 동안 플랑드르의 중심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와 더불어 유럽 상업망의 남과 북을 대표했다. 브뤼헤를 흔히 ‘북쪽의 베네치아’라 부르는 것은 ‘물의 도시’라는 이미지에 더해 교역시(交易市)로서의 활기찬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베네치아엘 가보지 못한 내가 판단하긴 어렵지만, ‘물의 도시’로서 브뤼헤를 백 개가 넘는 섬들이 수 백 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다는 베네치아에 감히 견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은, 브뤼헤의 물 이미지는 내가 몇 차례 가 본 암스테르담에도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 맞는 친구와 도시의 물길을 따라 걷는 것은 상큼한 경험이었다.

■ ‘사랑의 호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브뤼헤역은 구시가 남쪽에 들어서 있다. 역을 나와 구시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이내 ‘사랑의 호수’에 다다른다. 운하의 한 구역을 수문으로 막아놓은 곳이다. 미라벨도 이 이름의 연원을 자세히는 몰랐다. 그저, 독신자가 이곳에 들르면 애정운(愛情運)을 얻게 된다는 둥 얼버무렸다.

그 연원이야 어땠든, 이 낭만적 이름을 지닌 호수와 그 호수를 품고 있는 공원은 내가 플랑드르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하나다. 그 물과 숲길은 어느 플랑드르파 화가의 화폭에서 세상으로 막 뛰쳐나온 것 같기도 했다. 그 옆 베긴회 수도원 정원에 미라벨과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어느 봄날을 상상했다.

오늘날 플랑드르 전체를 대표하는 도시는 안트베르펜이다. 서플랑드르를 대표하는 브뤼헤는 동플랑드르를 대표하는 헨트보다도 작은 도시다. 그러나 중세의 한 때 브뤼헤는 그 뒤의 안트베르펜과 헨트를 합쳐놓은 것 이상의 경제적 정치적 위세를 뽐냈고, 그 위세가 잦아든 뒤에도 소위 플랑드르파 미술의 한 중심지였다.

성요한 병원의 일부를 이루는 멤링크 미술관은 그 북부 르네상스 미술의 흔적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브뤼헤에서 활동한 한스 멤링크만이 아니라 적잖은 플랑드르파 예술가들이 브뤼헤와 그 둘레 풍경을 제 작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뒤퍼 운하 옆 그뢰닝헤 미술관에선 이 도시를 사랑한 그 화가들의 컬렉션을 볼 수 있다.

■ 플랑드르파 미술의 중심지

물길을 제외하면, 이방인의 눈에 브뤼헤는 안트베르펜의 형제 도시 같았다. 브뤼헤를 북쪽의 베네치아라 아무리 우겨도, 플랑드르의 도시가 안트베르펜보다 베네치아를 더 닮을 수는 없을 터였다. 안트베르펜처럼 브뤼헤 구시가의 중심도 흐로터 마르크트다. 흐로터 마르크트는 ‘광장’이라는 밋밋한 뜻이다.

자기들이 사는 공간의 한복판을 광장이라 부르는 것은 플랑드르 사람들과 네덜란드 사람들의 오랜 관습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본 도시들에만도 흐로터 마르크트가 여럿 있었다. 브뤼셀에도, 헤이그에도, 로테르담에도.

안트베르펜처럼, 브뤼헤에도 성모교회가 있다. 두 교회의 첨탑은 플랑드르 땅에서 하늘로 가장 멀리 뻗은 인간의 흔적이다. 하기야 기독교 세계에는 성모라는 이름을 지닌 교회가 수 천 개, 수 만 개는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게 파리의 노트르담성당일 테다. 안트베르펜과 브뤼헤의 노트르담이 파리의 노트르담과 뭔가 다르듯, 플랑드르의 공기는 파리의 공기와 뭔가 확실히 다르다. 파리 북역을 떠난 열차가 플랑드르에 들어서는 순간, 북유럽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미라벨과 나는 브뤼헤에서 한 시간짜리 마차투어를 했다. 관광객 티를 내는 짓이었으나, 실제로 우리는 브뤼헤에 관광을 하러 간 것이었으므로 아무런 스스럼이 없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일식집에서 아리따운 아가씨의 봉사를 받기 전까지는.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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