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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23> 디지털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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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23> 디지털 동굴

입력
2007.11.22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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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어두운 동굴에 비유한 바 있다. 인간은 죄수처럼 그 동굴에 사슬로 묶여 있어, 오로지 동굴의 벽만을 볼 수 있다. 그 벽에는 동굴 밖에 있는 것들의 그림자가 비치는데, 인간은 그것을 참된 실재인 양 착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동굴의 비유는 오늘날 영화를 보는 관객의 체험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튼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계는 결국 조물주가 만들어낸 일종의 가상현실인 셈이다. 하지만 조물주만 가상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또 하나의 조물주로 만들어주었다. 디지털 기술 덕분에 요즘은 인간도 가상현실이라는 이름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세계 역시 동굴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일리노이스 대학의 ‘전자 시각화 연구실’에서 1992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가상현실의 테크닉을 선보였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동굴’(Cave Automatic Virtual Environment)이라 명명했다. 물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염두에 둔 이름이다.

‘CAVE’ 내부는 3개의 벽면과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면은 뒤에서 이미지를 쏘는 얇은 후방투사 스크린(rear projection screen)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위에서 아래로 이미지를 쏘는 하향 투사 스크린(down projection screen)으로 되어 있다. 이 여러 개의 스크린을 합쳐 하나의 가상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러 대의 프로젝터를 움직여 하나로 통일된 공간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는 이미지를 각 방향으로 배분하고, 그렇게 배분된 이미지들이 다시 하나로 합치도록 만들어주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이미 CAVE 시스템에 사용되는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시판되고 있다.

CAVE 시스템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관객의 동작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마그네틱 센서로 관객의 움직임을 파악해, 관객이 자리를 옮기면 그 자리에서 보이는 광경을 새로 만들어 스크린에 투사한다. 관객의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 내야 하므로, 가상현실에는 최고의 컴퓨팅이 필요하다.

3D 안경은 관객으로 하여금 2D의 평면적 이미지를 3D의 입체로 체험하게 해준다. 이 안경을 끼고 관객은 지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볼 수도 있고, 사물의 주위를 돌아가며 관찰할 수도 있고, 낯선 거리를 걸어 산책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이 정말로 가상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가상공간은 서울이나 뉴욕과 같은 현실의 도시일 수도 있고, 사이버 건축가가 디자인한 가상의 도시일 수도 있고, 태양계나 은하계와 같은 지구 밖의 우주공간일 수도 있고, 혈관이나 장기와 같은 인간의 신체 내부일 수도 있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분자나 원자의 구조와 같은 마이크로 우주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에나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 자신이 창조한 인공의 세계에 입장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신체가 아예 가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몰입’(immersion)이라고 한다. CAVE는 연습용으로 사용되는 각종 시뮬레이터, 머리에 쓰는 헤드마운트세트(HMD)와 더불어 가상현실의 3대기술을 이룬다.

원래 3면의 벽에 투사하는 시스템으로 개발된 CAVE 시스템은 곧 4면의 벽에 투사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하더니, 최근에는 6면의 벽에 투사하는 시스템으로까지 발전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어느 방향으로도 뚫리지 않은 온전한 정육면체의 공간 속에 집어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CAVE는 이미 여러 영역에서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령 여객선이나 항공기를 디자인한다고 해 보자. 실물을 건조하기 전에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다면, 문제점을 미리 찾아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또 이 기슬을 건축에 작용하면, 거주자의 입장에서 건물을 미리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게임과 같은 오락산업에도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실내에 커다란 공간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 경제성을 떨어뜨린다. 최근에는 ‘이머사데스크’(immersaDesk)라는, 하나의 스크린을 사용하는 변형 CAVE 시스템이 개발되었으나, 이는 완전한 몰입이 아니라 절반의 몰입(half immersion)만을 제공해준다.

3D 안경을 끼는 것도 실은 번거로운 일이다. 제프리 쇼의 작품 중의 하나를 체험해본 경험에 따르면, 안경을 끼고 스크린을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이 피로해지면서 현기증이 느껴진다. 3D 입체영화가 영화관에서 그리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CAVE 시스템이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래의 대중은 건물의 벽을 그저 벽으로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중들은 벌써 건물?벽을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컴퓨터의 모니터로, 그리하여 윈도우와 같은 인터페이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머잖아 거실의 벽면, 천장과 바닥이 거대한 LCD 화면으로 뒤덮일 날이 올 게다. (며칠 전 삼성에서 일반유리를 이용하는 LCD 화면을 개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럼 아파트의 거실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닷가로 몰입하거나, 새소리를 듣고 풀냄새를 맡으며 기분 좋게 숲 속을 산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전설에 황제가 화가에게 폭포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림을 침실에 걸어 두고 잠이 든 황제는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그림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드시냐는 물음에 황제가 답하기를, “물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었노라.” 이 전설이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다.

거실이 CAVE가 되면, 방안에서 루브르 박물관을 돌아보고, 시스틴 예배당으로 들어가 미켈란젤로의 벽화를 둘러보고, 아이야 소피아 성당을 거닐며 비잔틴의 모자이크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예술가들이 만든 가상현실 작품을 다운로드 받아, 그들의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에 또 다른 전설이 있어, 어느 화가가 제가 그린 풍경화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아예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CAVE는 이 전설마저 현실로 바꾸어 놓고 있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그 화가는 그곳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던데, 행여 그런 일은 없기를….

■ 47년전 체험극장 '센소라마'아날로그 제작 가상현실 오감 활용 관객들 몰입케…박물관行 불구 다시 각광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은 미국의 SF 작가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만서> (1984)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가상세계로 몰입한다는 발상은 이미 50년대에 시작됐다. <미래의 영화> (1955)라는 글에서 모튼 헬릭은 미래의 영화는 그 안으로 관객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꿈꾼 것은 다섯 가지 감각 모두를 사용하여 관객을 가상세계로 몰입시키는 새로운 영화. 그는 이를 '체험 극장'이라 불렀다. 얼마 후 그는 실제로 자신의 발상을 실현시켜줄 기계를 발명한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가상현실 장치인 '센소라마'(1960)다.

어설퍼 보인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가령 사진 속의 여인은 모터사이클을 달리고 있다. 여인의 눈앞에는 진짜 모터사이클을 타고 찍어둔 브루클린 시가의 모습이 동영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좌석은 진짜 모터사이클처럼 진동하고, 상자는 여인의 얼굴을 향해 바람을 뿜어댄다. 그 바람에는 물론 냄새가 섞여 있다.

모튼 헬릭은 이 기계를 위해 다섯 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이 기계를 계속 발전시키려던 그의 기획은 후원자를 찾지 못해 중단되고 만다. 센소라마는 결국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작동이 된다고 한다.

이 기계가 최근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다섯 가지 감각 모두로 체험하는 현실의 창조. 그것이 오늘날 가상현실기술이 이루려는 최종목표가 아닌가. 센소라마는 이미 그 시대에, 그것도 순수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다중감각(multi-sensory)의 가상현실을 만들어냈다. 놀랍지 않은가?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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