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자가 집 전화번호처럼 알기 쉬운 비밀번호를 사용했다면 통장과 인감을 훔친 절도범들이 돈을 인출했더라도 은행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최모(61ㆍ여)씨는 2005년 2월22일 오전 11시40분께 자신의 집에서 6,400만 원이 입금된 A은행 통장과 인감을 도난 당했다. 범인들은 같은 날 낮 12시49분 A은행 전북 모 지점에서 2,500만원, 오후 1시48분과 2시19분에는 도내 다른 2개 지점에서 잇따라 2,000만원과 1,900만원을 인출했다.
이들은 친분 있는 여성에게 인출을 부탁하는 방법으로 범행 2시간40분 만에 A은행 지점 3곳을 돌며 돈을 모두 빼내 달아났다. 범인들은 특히 최씨가 돈을 인출하는 데 필요한 통장 비밀번호를 집 전화번호 끝 네 자리로 설정해 놓는 바람에 이를 쉽게 추정해낼 수 있었다.
피해를 입은 최씨는 은행 측이 본인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돈을 내줬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1, 2심 법원은 “범인들이 통장 개설 지점이나 첫번째 인출 지점과는 전혀 다른 지점을 짧은 시간 안에 옮겨 다니며 잇따라 거액을 인출했는데도 은행 직원들이 별다른 의심 없이 돈을 내줬다”며 은행 측에 일부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 1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최근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는 비밀번호까지 일치한 점을 볼 때 금융기관이 의심을 가지기 어렵다”며 최씨가 일부 승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1일 밝혔다.
재판부는 “통장과 예금지급청구서에 아무런 하자가 없고, 진짜 인감을 사용하고 비밀번호까지 아는 사람에게 은행이 돈을 내 준 것은 특별히 의심할 만한 사정이 없는 한 금융거래 관행으로 볼 때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