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면 백포리, 여기까지 왔다 윤두서 고택 용마루에 기러기 한 마리 오래 앉아 있다 기러기는 움직이지 않는 기러기다 움직이지 않음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저 방식이 불편하다’(‘구름 저편에’에서)
조용미(45ㆍ사진) 시인은 네 번째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에서도 길을 걷는다. 시집 속엔 만일암터(전남 해남), 흑산(전남 신안), 다랑쉬(제주) 등 한반도 남쪽 지역의 구체적 장소들이 호명된다. 나의>
그 곳의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쓴 시편들은, 그러나 자연의 표면적 아름다움을 천착하는 기행시가 아니다. ‘풍경의 침묵에 대한 해독자’(평론가 최현식)라는 시인에 대한 평가는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2004)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이번 시집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삼베옷을>
시집엔 검은색의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경남 하동 묵계리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모과가 검게 변할 때까지 나의 방은/ 묵계 물소리로 깊어가리’(‘물소리를 듣는다’)라 생각하고, ‘검은 옻칠을 한 커다란 관’이 실린 운구차에 홀로 남아있는 악몽을 꾸며 비명을 지른다(‘징소리를 따라갔다’).
이 때 검은색은 익숙한 대로 죽음의 이미지로 읽힌다. 하지만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대척에 선 것이 아니라, 삶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격렬하다 우주는/ 별과 나무와 고래가 들숨과 날숨 사이의/ 한 호흡에 있다/ 모든 행성이 발 디딜 데 없는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별의 죽음).
나아가 검은색은 타나토스의 욕망에 맞닿은 미적 절정의 표상이기도 하다. ‘검은 담즙’이란 시에서 시인은 흑하(黑河)란 이름의 하천이 폭포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폭포는 검은 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통찰한다. 흔히 내면의 절망을 은유하는 쓸개즙(담즙)이 조금조금 모여 강을 이루고, 이윽고 폭포 아래에서 부서져 거품이 된다.
시인은 그 헛되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절멸(絶滅)’이라고도 하고 ‘생을 가르는 검(劍)’이라고 한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허무의 순간에 충만한 고양감이 깃든다. 우레를 꿀꺽 삼켜버린 소나무에 ‘흉터가 더 푸르다’(‘소나무’).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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